세계가 환호했던 발레 춘향…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복 입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3.09 05:00

업데이트 2022.03.0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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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문훈숙(왼쪽) 유니버설발레단 단장과 이정우(오른쪽) 디자이너. 창작발레 ‘춘향’의 탄생엔 이 둘의 우정이 있었다. 김현동 기자

문훈숙(왼쪽) 유니버설발레단 단장과 이정우(오른쪽) 디자이너. 창작발레 ‘춘향’의 탄생엔 이 둘의 우정이 있었다. 김현동 기자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과 이정우 디자이너를 만난 날은 올해 입춘(立春)이었다.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켰지만 봄이 들어선다는 이날은 인터뷰에 적격이었다. 문 단장과 이 디자이너가 합심한 ‘발레 춘향(春香)’을 위한 인터뷰여서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춘향’을 봄의 향기 물씬한 이달 18~2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다.

‘발레 춘향’은 ‘심청’과 함께 한국만의 스토리를 테마로 만들어낸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리지널 작품이다. 영어 제목 ‘춘향의 사랑(The Love of Chunhyang)’으로 오만ㆍ콜롬비아 등 세계 각지 무대에도 올라 갈채를 받았다. 이정우 디자이너가 창작한 의상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호평받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K-발레’의 선구자 격인 셈.

발레 '춘향' 포스터. ⓒ유니버설발레단_photo by Kyoungjin Kim

발레 '춘향' 포스터. ⓒ유니버설발레단_photo by Kyoungjin Kim

‘발레 춘향’으로 이번 봄마중을 하기까지, 문 단장의 지난 겨울은 길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은 발레단도 강타했다.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던 재작년은 특히 엄혹했다. 1984년 창단 후 처음으로 휴단까지 했다. 단원들에게 정부 지원금이라도 주기 위해, 규정을 지키기 위해 연습실 문도 아예 걸어잠궜다고 한다. “하루를 쉬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쉬면 지도자가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일의 연습이 중요한 게 발레다. “무용수들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냥 계속 눈물이 났어요”라는 문 단장의 눈에 다시 물기가 어렸다.

곁에서 그런 그를 지켜보던 이정우 디자이너가 문 단장에게 응원의 눈길을 보냈다. 세간엔 고(故) 이영희 디자이너의 딸이자 배우 전지현 씨의 시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이정우는 그냥, 이정우다. 이영희 씨가 프랑스 파리에 부티크를 열고 ‘바람의 옷’ 등 한복으로 정면승부를 볼 수 있었던 건 든든한 파트너인 디자이너 이정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터.

그런 이정우 디자이너는 “우리 문 단장님은 내 뮤즈(muse)”라며 “어려움을 딛고 이렇게 같이 ‘춘향’ 무대를 올릴 수 있어서 어찌나 기쁜지 모른다”며 시원스런 미소를 지었다. 문 단장 역시 “우리 삶 속에 예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정우 선생님과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새삼 깨달았다”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 매사에 감사함을 팬데믹을 통해 배웠다”고 화답했다. 다음은 인터뷰 중 일문일답 요지. 인터뷰는 서울 광진구 능동 문 단장의 사무실에서, 촬영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진행했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영원한 현역이다. 김현동 기자

이정우 한복 디자이너. 어릴 때 발레를 했고 두 아들에게도 잠시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한다. 발레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 김현동 기자
발레는 상체의 우아한 움직임과 하체의 역동성과 밸런스가 중요한데요, 한복 의상 제작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정우 디자이너=“‘발레 춘향’은 제가 추구하는 것과 딱 들어맞는 작품이에요.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남과 여의 만남이 다 녹아있죠. 아무도 엄두를 못내던 때 프랑스 파리에 한복을 들고 갔을 때와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제의를 받고서는 두말않고 하겠다고 했죠. 테마가 확실해서 오히려 작업하는 게 쉽고 즐거웠어요. 세계 어디에 내놔도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의상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났죠. 그러다 보니 패턴만 수십번을 떴고, 가봉만 10번 넘게 했죠.”  
문훈숙 단장=“한복과 발레는 통하는 게 많아요. 한복의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해가 갈수록 깨달아요. 발레도 결국 라인, 선이 중요한 예술이니까요. 무용수들에게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지 말고 내 몸이 스피커라고 생각하고 추라고 하거든요. 의상도 그냥 입고 추는 게 아니라 춤을 표현해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발레 춘향’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장면은 춘향과 몽룡의 초야 파드되(pas de deux, 2인무)와 몽룡의 과거 시험 장면에 등장하는 남성 군무다. 이정우 디자이너는 초야 파드되에서 흰 색 실크를 고집했다고 한다. 남성 무용수가 여성 파트너를 리프트, 즉 들어올리거나 턴을 돌리는 장면이 많은 파드되의 특성상, 실크 소재는 웬만해선 선택이 어렵다. 재봉은 어려운데 손상은 쉽게 가서 디자이너 입장에선 까다롭기 그지 없어서다. 이정우 디자이너는 “어려워도 반드시 그 장면은 실크를 써야 했어요”라고 했다. 그의 자신감은 몽환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파드되를 탄생시켰다. 문 단장도 아끼는 장면이다.

발레 '춘향'의 한 장면. 3월 18~20일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유니버설발레단_photo by Kyoungjin Kim

발레 '춘향'의 한 장면. 3월 18~20일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유니버설발레단_photo by Kyoungjin Kim

과거 시험 남성 군무 장면에선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남성 무용수들의 역동적 움직임이 압권이다. 의상이 무용수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도와준다. 의상도 춤을 춘다고 느껴질 정도.

발레단을 평가할 때 군무의 짜임새 역시 중요한 요소인데, 의상과 안무, 무용수들의 기량이 빼어나다는 점에서 문 단장이 자랑스러워할만한 장면이다. 고(故) 이영희 선생도 ‘춘향’을 아꼈다고 한다. 이 디자이너는 “엄마께서 칭찬을 진짜 안 하시던 분인데, ‘발레 춘향’으로는 ‘우리 딸 장하다’고 해주셨다”며 “‘나무랄 데가 하나 없다’고 칭찬해주신 건 거의 처음이었던 거 같다”고 회고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과 ‘춘향’은 매번 진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문 단장=“매번 올릴 때마다 새롭게 보완할 게 보여요. 시대도 변하고 트렌드도 변하니 그 변화에 발을 맞춰야죠. 영상을 추가해 다채로운 무대를 꾸민다거나, 음악을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로 바꾼 것 등등이 그렇죠. 아 하나 안 바꾼 거 있어요. 의상(웃음).”  
이 디자이너=“(웃으며) 각 캐릭터마다 같은 한복이지만 다른 디자인적 요소를 가미했어요. 치마의 볼륨이며 색상까지 신경썼죠. 대신 다 다르면 지저분해 보이니 통일성을 위해 그룹별로 차별화를 했어요.”  
팬데믹 이후 세계 각국 발레단에서 ‘춘향’을 공연하는 모습도 보고 싶네요.  
문 단장=“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이후 부쩍 세계적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이젠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됐죠. (인터뷰 직전 주말에 열린 스위스) 로잔 발레 콩쿠르(Prix de Lausanne)에서 우리 발레 꿈나무들이 선전했고요. 나중에 ‘춘향’이나 ‘심청’과 같은 우리만의 스토리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걸 꼭 보고 싶습니다. ‘춘향’은 남녀의 사랑, ‘심청’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이야기죠. 만국 공통으로 통하는 메시지가 있어요.”  
이 디자이너=“우리가 열심히 하는 걸 잘하고, 잘 하는 걸 열심히 하다보면 세계의 문은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는 것 같아요. 유니버설발레단도 잘하고 있으니, 하는대로 계속 하면 될 겁니다.”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 함께 선 문훈숙 단장과 이정우 디자이너. 김현동 기자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 함께 선 문훈숙 단장과 이정우 디자이너. 김현동 기자

유니버설발레단은 3월 ‘발레 춘향’에 이어 6월엔 ‘잠자는 숲속의 미녀’, 10월엔 ‘오네긴’에 이어 12월엔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2022년 라인업을 꾸렸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클래식 발레의 정수로, 문 단장 본인도 “현역 시절 가장 힘들었던 작품”으로 꼽았다. 무용수에게 요구되는 테크닉도 많은데다 러닝타임도 길어서다. 그런 작품을 선택했다는 대목엔 문 단장의 일종의 결기가 담겨 있다.

겨울이 길었던만큼 다가오는 봄이 더 소중한 시절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봄은, ‘춘향’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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