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 상식 강의가 혁신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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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6월 8일 강원도의 한 콘도에선 공정거래위원회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주말 아닌 평일에 1박2일로 '혁신 워크숍'이 열렸다. 노무현 정부가 강조하는 '정부 혁신' 구체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날 진행된 혁신 프로그램에는 '알기 쉬운 한방 상식' 강의도 있었다. 공정위는 강사인 한의사에게 50만원을 지급했다.

경찰청은 올해 혁신 목표로 '평생학습 지식관리체계 구축, 민원 프로세스 혁신, 여성과 학교폭력피해자 원스톱 서비스' 등 세 가지를 정했다. 이 사업을 하겠다며 2억원의 예산을 받았지만 이 중 2000만원은 경찰청 자체 홍보비로 썼다. 현 정부의 혁신 예산 중 상당 부분이 엉뚱한 곳에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다음 정부에서도 혁신사업을 하도록 강제하는 '정부 혁신 추진법'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 혁신 비용 얼마나 썼나=정부는 공무원 상시 학습체제 구축, 행정정보 공유체계 구축, 디지털 정책 홍보 강화 등 25개 사업을 올해 공통 혁신과제로 선정했다. 또 50개 부처들이 3~5개씩 모두 184개의 고유 혁신 과제를 선정해 추진하고 있다.

이런 혁신사업을 한다며 2004년 이후 정부가 쓴 예산은 809억원이 넘는다. 각 부처에서 증원한 혁신 담당 공무원 인건비는 별도다. 구체적으로는 혁신 교육에 334억4000만원, 혁신 평가.관리에 340억원이 들어갔다. 실제로 과제를 수행하는 데 쓰인 돈은 전체의 17%에 불과하고 교육과 평가관리에 전체의 85%를 쓴 것이다. 국회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실제 일하는 것보다 교육과 평가에 쓴 돈이 압도적인 기형 구조"라고 지적했다.

◆ 세미나.교양 강의에 쓰이는 혁신 예산=더 큰 문제는 상당수 교육 과정이 업무와 별 관련없는 교양 강좌 등으로 채워진다는 점이다. 고충처리위원회는 올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열한 번의 혁신 교육을 했다. 이 중 다섯 번은 '홍보란 무엇인가' '의사들이 절대 말해주지 않는 건강이야기' 등의 내용이었다. 한 정부출연기관은 저명인사 초청 강연과 중국 단기연수비로 1600만원을 썼다. 중앙부처의 공무원은 "모임 이름에 '혁신'만 붙으면 활동비가 나온다는 말도 있다"고 전했다.

예산정책처 조사 결과 얼마 되지 않는 혁신과제 추진 예산마저 다른 용도로 돌려쓴 경우가 많았다. 건설교통부의 경우 과제추진예산 5억7600만원 중 4억원 이상을 교육훈련 예산으로 재편성했다. 심지어 직원 체육대회, 식당 리모델링, 회의실 중계시스템 구축으로 전용한 부처도 있었다.

◆ 혁신 과제 실효성 논란='부처별 특성에 맞는 성과관리 시스템 개발'은 정부 공통 혁신 과제다. 하지만 26개 부처는 이 항목을 자기 부처의 고유 혁신 과제로 다시 선정했다. 공정하고 투명한 검사 인사시스템 구축(법무부), 통계서비스 체계 구축을 통한 고객감동 제고(통계청) 등 당연히 해야 할 부처의 고유 업무에 혁신 딱지만 붙여놓은 것도 적지 않다.

국회 정무위 예산심사를 위해 혁신 예산 내역을 점검한 열린우리당 신학용 의원은 "혁신 예산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현철 기자

◆ 정부 혁신 사업=더 나은 행정을 위해 정부가 일하는 방식과 문화, 구성원들의 사고 방식 등을 개선하는 것. 어느 정권이나 추진해 왔으나 현 정권에서는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공무원들의 혁신역량 개발사업과 정부 공통.부처 고유 혁신과제 추진사업, 혁신 평가사업으로 나눠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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