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 권위, 왜 필요한 것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우리 사회는 지금 권위 상실에서 오는 깊은 정치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한국은 어느새 아무도 그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돼 버렸다. 아이들은 어른을, 학생들은 스승을, 후배는 선배를, 초보자는 대가(大家)를 권위 있는 인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권위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바로 18세기 유럽이 그랬다. 이른바 '합리주의'라는 기치를 내건 계몽주의자들은 당시 유럽 사회의 권위를 독점하고 있었던 교회와 군주에 대해 맹렬히 도전했고 권위라는 개념을 파괴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권위주의를 파괴한 것은 필요한 행동이었고 바람직한 역사적 단계였다고 본다. 그러나 '권위주의'와 더불어 '권위'까지 청산한다면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우리나라의 경우가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권위까지 저버린 경우가 아닌가 한다.

*** 대통령 지시가 안 먹히는 까닭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가 혼란스러운 것은 바로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통치는 권위를 전제로 한다. 권위 없는 리더십(leadership)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부터 권위 부족(authority deficit)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니까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들조차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대통령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권위 부족 현상은 학교에서 선생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학생들은 선생을 어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기대와 일치하지 않으면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정치와 사회에서의 무한한 합리주의는 결국에 가서는 국가라는 조직 자체를 위협하게 되고 인간들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만다. 왜냐하면 사회공동체는 원래부터 '합리주의' 논리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인간들의 실제 생활 과정에서 누적된 관습과 전통의 산물이다. 인간에게 합리주의는 필요하지만 사람은 합리주의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정치 공동체는 이성과 감성, 진보와 전통이 유기적으로 융합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권위는 권위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권위를 파괴하지 않으면 권위주의를 타파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권위주의는 독재.전체주의.억압정책을 가져 오지만 '권위'는 권위를 소지한 사람이 외부에서 도전 또는 요구를 받으면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전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권위가 인정되는 인물은 그러한 긍정적 전제 때문에 항상 명백하게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권위'도 '권력'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복종을 끌어낼 수 있지만 '권력'은 강제로, '권위'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게끔 하는 것이 본질적인 차이다.

'권위'는 어떤 학문 분야에 또는 공동체에 적용되는 표현이다. 그리고 어떤 인물이 어떤 특정한 분야의 권위라고 할 때 그 권위는 필요한 경우 그 분야에 대해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권위 있는 사회에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시끄럽지 않다. 많은 것이 전제되고 많은 사람은 그 같은 전제들을 받아들인다. 권위는 강요하지 않으면서 질서를 지키도록 한다.

*** 유럽 합리주의 운명 생각하라

지금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퇴출시켜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오늘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한국 사회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18세기 유럽의 합리주의가 당면했던 운명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모든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고 완벽한 합리적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은 결국 인간들을 오만하게 만들었고 20세기 전체주의를 낳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권위는 이성의 한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보다는 온건을, 이성과 더불어 전통을, 그리고 무엇보다 삶 자체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권위가 필요한 이유다.

김경원 사회과학원장.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