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된 킹달러] 환율 레벨업 1300원+α, 미·유럽 직구 줄고 경차 판매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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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저로 일본 여행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사진은 인천국제공항 도쿄행 항공편 시간표. [연합뉴스]

엔저로 일본 여행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사진은 인천국제공항 도쿄행 항공편 시간표. [연합뉴스]

세계 주요 통화 가운데 달러 가치가 나홀로 오르면서 한국을 비롯해 주요국의 경제·산업 구도가 변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달러 환율이 수십 년 만에 최고치(자국 가치 하락)를 경신했고, 이로 인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만 해도 지난해 1100원대였던 원·달러 환율은 현재 1300원 후반대에 이른다. 상반기 내내 1200원~1300원대를 오갔고, 9월 이후부터는 1300원~1400원대를 오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64년 이후 연평균 환율이 1300원을 넘긴 건 IMF 사태가 한창이던 1998년 외에는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연간 환율은 1300원을 넘을 가능성이 크다. 원·달러 환율이 ‘레벨업’되는 셈이다.

환율 급등에 수입 제품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는 등 국민들의 삶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 17살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 50대 직장인 김모씨는 “환율 급등으로 한국에서의 한 달 생활비를 70만원 가까이 줄여 그만큼 미국 생활비로 더 보내고 있다”며 “1년 내내 고(高)환율이 이어지고 있어 아들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달러 강세가 당분간 더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원·달러 환율 1300원대, 레벨업된 환율이 ‘뉴노멀’(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는 분석마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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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거리의 여행객 모습, 달러 강세 영향으로 미국인 여행객 수가 늘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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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달러 환율이 상승하면서 눈에 띄게 변화가 생긴 곳은 무역 시장이다. 수출만큼 수입이 많은 한국은 올해 들어 10월까지 누적 무역적자가 300억 달러를 넘어 섰다. 누적 적자 규모는 총 355억84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속에 수출 자체도 줄긴 했지만, 무역수지 적자는 그보다 수입액 급증 영향이 크다. 10월 수출액은 524억8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7% 감소했다. 그런데 이 기간 수입액은 591억8000만 달러로 9.9% 급증했다.

전쟁·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위기로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오른 데다 환율이 뛴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원자재 가격과 환율이 동시에 상승하면서 특히 에너지 수입액이 크게 늘어난 게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10월 원유·가스·석탄 수입액이 전년 동월보다 42.1%(46억 달러) 증가한 153억3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적자 폭을 키웠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강(强)달러 현상이 계속되는 한 무역적자 상황은 계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입 제품 가격이 뛰면서 국민들의 소비 패턴도 하나 둘 바뀌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수입물가지수는 지난해 동월보다 24.1% 올랐다. 환율 상승 영향으로 컴퓨터와 같은 정보통신기기나 스마트폰 등의 소비자가격은 대부분 상승했다. 10월 새로 출시된 아이폰14 시리즈를 구매하려고 했던 김모(24)씨는 “그동안 신제품을 기다려왔는데 환율이 너무 올라 가격이 부담스러워졌다”며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구형 모델로 눈을 돌렸다.

자동차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휘발유 가격이 1600원~2100원대를 오가면서 대형 고급차보다는 현대 ‘캐스퍼’, 기아 ‘레이’ 등 소형 경차가 더 잘 팔린다. 꾸준히 판매량이 늘던 경차는 올해 3월 1만2211대가 팔렸는데, 이는 2019년 3월 이후 월간 기준 최고치다. 7월엔 1만2886대를 기록하며 올해 최고치를 찍었다. 수입차 시장에서는 미국차의 판매량 감소가 눈에 띈다. 올해 1분기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합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2.2% 상승하는 등 견고한 호조세를 보였으나, 달러 가치 상승 여파로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카이즈유 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10월 수입 승용차 등록 대수에서 포드는 전월 대비 67.5% 줄었고, 링컨도 70% 넘게 빠졌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캐딜락(-35.8%)과 지프(-25.25%)도 감소세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달러가 워낙 강세다보니 미국산 자동차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포드는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익스페디션 가격을 최근 10% 이상 인상했다. 지프도 8월 주력 모델인 랭글러 판매가를 330만원 인상했다. 김 교수는 “고환율이 계속 이어진다면 미국 수입차의 가격 인상 압박이 더 커질 것”이라며 “차량 구입을 포기하거나 상대적으로 환율 영향을 덜 받는 브랜드로의 이동이 더 빨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달러 환율이 한국보다 더 뛴 일본의 자동차 브랜드는 상대적으로 덕을 보고 있다. 도요타는 4~9월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증가한 17조7093억엔에 달했다.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던 ‘직구’(해외 제품을 현지 e커머스를 통해 직접 구매)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직장인 심모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최근 캐나다 브랜드 레깅스 제품을 미국에서 직구로 구매하려다 국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의 한 온라인 쇼핑몰이 할인 행사 중이어서 관심을 가졌지만, 원·달러 환율이 크게 뛰면서 가격 이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심씨가 구매하려던 레깅스는 60달러로 원·달러 환율이 1100원대라면 7만원 안쪽에서 구매할 수 있지만, 1300원 후반대인 지금은 8만원까지 올랐다.

여기에 배송비·배송기간 등을 고려하면 차라리 국내 쇼핑몰(8만5000원)에서 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 지난해 해외 직구가 급증했던 골프 용품도 이제는 국내 가격이 더 유리해졌다. 한국소비자원 조사 결과 골프공·골프화 24개 제품 중 국내 18개 제품은 국내 가격이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구 대상지역도 변화하고 있다. 3분기 온라인 해외직구 구매액 현황을 보면 국가별 비중은 전 분기 대비 미국이 5.7%포인트, 유럽이 3.3%포인트 감소한 반면 중국은 7.9%포인트, 일본은 1.1%포인트 증가했다. 중국과 일본은 지난해 3분기와 비교 해봐도 각각 61.1%, 38% 증가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환율에 따라 구입 가격의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제품 구매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행 시장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특히 원·엔 환율이 내리면서 일본여행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9월 16만8000명이었던 일본 항공편 수송객 수는 지난달 41만6000명으로 2.5배가량 증가했다. 올해 초 100엔당 1050원대였던 원·엔 환율은 현재 100엔당 930원대다. 일본여행 비용이 올해 초보다 10%가량 저렴해진 것이다. 박수영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여행 수요가 급증한 건 무비자 허용 영향도 있지만 하반기 들어 원·엔 환율이 가파르게 내린 영향도 있다”며 “당분간 원·엔 환율 상승 원인이 보이지 않는 만큼 일본여행 수요는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여행 비용 올해 초보다 10% 저렴

한국을 찾는 외국인 여행객 가운데는 단연 미국인의 증가세가 눈에 띈다.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통계에 따르면 9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33만7638명으로 4월(12만7919명) 대비 163% 증가했다. 이 중 고환율의 영향을 직접 받는 미국인 관광객 수가 급증했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미국인이 19.8%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은희 교수는 “미국인들이 명동거리 등에 늘어난 이유는 강달러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며 “강달러가 지속되는 한 이 같은 현상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환율의 ‘뉴노멀’로 인한 변화는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부동산 시장이 활황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급락한 데다 일본 정부가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면서 해외 투자금이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한국 등 주요국이 물가 상승세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부동산 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장승우 대신증권 연구원은 “부동산 투자 땐 대출을 활용하기 때문에 일본처럼 국가의 국고채 금리가 낮을 수록 투자 수익률은 좋아 진다”며 “최근 해외 투자자들이 일본 부동산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실제 국고채 금리를 고려한 국가별 부동산 투자수익률은 도쿄 3.4%, 파리 2%, 뉴욕 1.6%, 런던 1.6%, 서울 -0.9%로 도쿄가 가장 높았다.

일본 리츠(J-REITs)의 외국인 수급 동향에서도 외국인 부동산 투자 추세가 뚜렷하다. 엔화 약세가 심화된 3월 외국인 투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7월까지 누적 외국인 투자금은 1200억 엔을 기록했다. 싱가포르의 부동산 운용사인 케펠리츠는 최근 도쿄의 한 오피스 건물을 8570만 싱가포르달러(약 860억원)에 계약했다. 홍콩계 사모펀드인 가우캐피탈파트너스도 글로벌 사모펀드 블랙스톤과 일본 물류창고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다. 거래 규모는 5억4000만 달러(약 7670억원)에 이른다. 앞서 가우캐피탈은 엔화 약세를 활용해 앞으로 2년간 최대 40억 달러(약 5조6840억원)를 투자할 것이란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장승우 연구원은 “저금리가 이어지고 있어 현지에서의 자금 조달이 용이하고, 엔저로 환차익도 기대할 수 있어 당분간 해외 투자금 유입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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