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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반가운 건 쌀·라면·김치|주 동구 공관원들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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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헝가리·유고·폴란드·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 그리고 소련-. 88올림픽을 계기로 우리가 숨가쁘게 내달아 온 북방외교가도의 주요거점이다.
불과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적대 관계였던 이들 구 공산국가의 심장부에는 이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 태극기 밑에서 외교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공관 원들은 한껏 자라난 우리의 국력에 가슴이 뿌듯하다.
소련 등 동구 7개 공관에 나가 있는 우리 외교관은 공노명 주소대사를 비롯해 대사·참사관·서기관 등 모두 40명, 가족까지 합치면 1백30여명이다.
북방외교의 첨병인 공관 원들은 그러나 생활전선에선 동구의 황량한 환경에 고충이 많다. 쓸 만한 아파트하나 구하기 어렵고 돈이 아무리 있어도 한국인 입맛에 맞는 먹을거리가 없다. 서울처럼 휘황찬란한 밤도 없어 향수를 달랠 방법도 마땅치 않다.
북방공관의 으뜸가는 골칫거리는 먹는 문제. 고생하기로는 숨막히게 더운 중동이나 풍토병이 겁나는 아프리카가 더할지 모르나 그래도 그곳은 수입물자가 넉넉해 먹을거리는 걱정 없다.
공 대사 등 6명으로 구성된 모스크바 팀에는 서울의 가족과 본부에서 KAL로 공수해 주는 쌀·라면·김치·채소 등 이 더 없는 진 객이다.
특히 라면은 회식용 별미.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받기 위해 최근 서울을 다녀간 공 대사는『하도 라면을 많이 먹어 제조회사별로 맛을 구별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소련과 달리 KAL직송편이 없는 체코·폴란드·헝가리 공관 원들은 인근 서유럽국가인 오스트리아의 빈 대사관이나 서독의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을 통해 비행기편으로 지원 받는다.
그러나 항공료가 워낙 비싸 주 프라하 대사관 같은 데서는 야간차량운송작전도 감행하고 있다. 이택호 서기관(32)등 젊은 직원들은 밴(소형 봉고 차)을 몰고 밤새 4시간을 달려 빈으로가 쌀·채소·사무용품 등을 사 오는데『김장트럭 운전사가 된 느낌』이라는 심경을 토로한다고.
두 번째 고생거리는 집 문제. 원체 사무실·주택사정이 형편없어 쓸 만한 대사관 건물이나 직원아파트는 하늘의 별 따기.
지난 2월 영사 처로 시작했던 주 모스크바 대사관은 이사를 네 번이나 했으나 아직도 아파트건물의 한 구석을 면치 못한 신세.
세 번째로 입주했던 스프러스 호텔에서는 불가피하게 식당까지 차러 놓았다가 호텔 측으로부터 『찌개냄새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불평하니 옮겨 달라』는 매정한 요구까지 받았다.
소련 측이 대사관저로 알선해 주었던 22평 짜리 아파트(30층 중 16층)는 월 임대료가 9백14불(64만원)인데도 복도마다 쌓인 쓰레기사이로 쥐가 왔다갔다하고 러시아 꼬마들의 방뇨로 오줌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
결국 공 대사는 스프러스 호텔에 그대로 머물고 있고 이 아파트는 서기관 한사람이 대신 쓰고 있다. 최근 동구공관을 다녀왔던 본부직원은 이 아파트에 대해 『툭하면 고장나는 엘리베이터가 겁나 16층에서 걸어 내려왔다』고 사정을 전했다.
프라하(체코)나 바르샤바(폴란드)의 대사관은 2층 짜리 단독건물을 임대해 그런대로 사정이 나은 편이나 베오그라드(유고), 부쿠레슈티(루마니아), 소피아(불가리아)등은 아직도 호텔을 벗어나지 못했다.
직원숙소는 구하기가 더 어려워 상당수의 공관 원들은 호텔생활을 하고 있는데 고국의 가족을 데려올 수 없어 이산가족이 됐다.
가족도 곁에 없는 데다 마음 쏟을 문화·오락생활도 별로 없는 공관 원은 고독과 싸워야 한다. 바르샤바 인터콘티넨틀 호텔에 묵고 있는 김경철 폴란드 대사는 다녀간 본부직원에게 『주말만 되면 갈곳이 없어 공원 벤치에 앉아 분수를 쳐다보며 향수를 달랜다』고해 직원은 가슴이 찡했다고 한다.
현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북방 공관 원들은 미 CNN(뉴스네트워크)방송을 시청하기 위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인공위성수신용 패러볼라 안테나를 세운다.
1주일 또는 2주일에 한번씩 오는 고국의 신문·잡지·편지 등은 사막의 단비.
프라하 대사관의 직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오는 파우치(외교행랑)를 받으러 빈대사관이나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에 찾아가는 1박2일 코스가 병영생활의 외박만큼이나 목 빠지게 기다려진다.
자녀가 있는 공관 원들은 학교 보내기도 간단치 않다.
개방으로 외국인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소련·동구의 외국인학교는「만원사례」.
모스크바대사관의 서현석 참사관은 초교 6년 생 딸을 외국인학교에 넣기 위해 6개월을 기다리고서도 시설확장 기부금조로 1천 달러를 내야 했다.
체코·유고는 한국처럼 초·중·고 12학년제가 아니라 8학년까지밖에 없어 우리 공관 원 자녀들은 9학년부터 부모와 헤어져 인근 오스트리아로 가야 한다고.
개방의 부작용으로 급증하는 범죄도 걱정거리. 모스크바 대사관 직원들은 아침에 일어나 자동차 앞 유리가 없어진 것을 보았으며 바르샤바에선 우리 상사원 집이 도둑맞아 공관 원들은 다녀가는 본부직원에게『밤이 불안하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외무부는 북방공관의 이같은 애로사항을 고려해 지원책을 강구하고 있다. 1백40여 개 공관 중 중동·아프리카 같이 현지생활에 어려운 60여 곳을 따로 분류하는「특수지역」속에 이미 헝가리·폴란드 대사관을 넣었고 소련 등 다른 북방공관도 곧 추가시킬 계획이다.
특수지역에 속하면 4급 서기관 기준으로 지급되는 월 3천∼3천5백 달러의 봉급·수당 외에 월 4백∼5백 달러가 특별 지원된다.
북방 공관 원들은 사회주의의 구 각을 벗지 못한 동구의 현지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면서도「못사는 유럽」이 한국에 보내는 기대의 시선에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근무하고 있다.
공 대사는『소련TV. 신문에 한국기사가 빠지는 날이 없어요』라고 현지의 한국 붐을 전하고 있다. <김 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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