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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1조’ 42세 수낵…트러스 감세 후폭풍 수습 나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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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국의 리시 수낵(42) 전 재무부 장관이 24일 제79대 영국 총리로 확정됐다. 이날 마감된 집권 보수당의 대표 후보로 단독 등록하면서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에선 집권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다.

지난 9월 5일 영국 보수당 대표 경선 결과 발표 당시 리시 수낵 재무부 장관(왼쪽)과 리즈 트러스 외교부 장관이 나란히 앉아 있다. 당시 경선 승리로 총리에 오른 트러스가 20일 물러나고 수낵이 24일 신임 총리로 확정됐다. 수낵이 9월 경선에서 패배한 지 49일 만이다. [AP=연합뉴스]

지난 9월 5일 영국 보수당 대표 경선 결과 발표 당시 리시 수낵 재무부 장관(왼쪽)과 리즈 트러스 외교부 장관이 나란히 앉아 있다. 당시 경선 승리로 총리에 오른 트러스가 20일 물러나고 수낵이 24일 신임 총리로 확정됐다. 수낵이 9월 경선에서 패배한 지 49일 만이다. [AP=연합뉴스]

이로써 수낵은 지난 9월 초 당 대표 경선에서 리즈 트러스 전 총리에게 밀려 고배를 마신 지 49일 만에 새 총리로 확정됐다. 수낵은 이르면 25일 찰스 3세 국왕의 재가를 얻어 총리에 임명된 뒤 새 내각을 구성할 것으로 보인다.

이날 BBC에 따르면 수낵 전 장관은 보수당 전체 의원(357명) 중 약 200명의 지지를 얻어 유일하게 당 대표 출마 후보의 등록 요건인 100명 이상의 추천을 받았다. 수낵 전 장관과 겨룰 것으로 전망됐던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전날, 페니 모돈트 원내대표는 이날 각각 불출마를 선언했다. 보수당은 지난 20일 트러스 전 총리가 감세 정책 후폭풍으로 사임하자 내각 안정을 위해 ‘스피드 경선’을 하기로 했다.

1980년 5월생으로 만 42세인 수낵은 영국에서 1812년 로버트 젠킨슨(만 42년 1일) 이래 210년 만에 가장 나이가 적은 총리 기록을 세웠다. 역대 최연소 기록은 1783년 24세에 임명된 윌리엄 피트가 계속 보유한다.

정치경험 부족, 고비 잘 넘길지 미지수

조부 때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영국으로 옮긴 이주민 3세인 수낵은 초대 영국 총리인 로버트 월폴이 취임한 1721년 이래 301년 만에 첫 비(非)백인 총리가 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가디언은 “1874년 총리에 오른 유대인 출신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수낵은 트러스 전 총리가 내놓은 감세 정책 후폭풍을 수습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인한 물가 상승 등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수낵은 23일 출마선언을 하면서 “우리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고, 내가 총리가 돼 영국 경제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옥스퍼드대에서 PPE(철학·정치·경제학)를 전공하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대학원(MBA)을 마친 수낵은 골드만삭스와 헤지펀드 등에서 근무한 금융인 출신이다. 2020년 2월 재무부 장관에 취임해 적극적인 재정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지난 9월 당 대표 경선에선 트러스 전 총리와 정반대로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면서 법인세를 19%에서 25%로 인상하고, 국민보험(NI) 분담금 비율을 1.25%포인트 인상하는 등 증세를 추진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위해 감세를 해야 한다”는 트러스 전 총리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수낵은 “동화 같은 계획이라 경제위기를 몰고 올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당원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러스 전 총리가 지난달 재정 공백에 대한 대안이 없는 감세 정책을 내놓자마자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고, 국채 이자가 올라 정부 차입 비용이 급등했으며 전 세계 시장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 뒤 트러스 전 총리의 감세 정책을 뒤집은 제러미 헌트 재무부 장관은 텔레그래프에 “수낵 전 장관은 자금 대책이 없는 감세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그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수낵 전 장관은 이제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의 경제위기 예언이 총리실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가디언은 수낵에 대해 “위기에 대응할 폭넓은 경험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2015년 정계에 입문한 수낵은 다른 장관 경력 없이 2020년 보리스 존슨 전 총리에 의해 바로 내각의 실질적인 2인자인 재무부 장관에 파격 발탁됐다.

프라다 신고 건설현장에…서민 반감도

수낵이 자중지란에 빠진 보수당을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는 특히 미지수다. 영국은 2016년 6월 유럽연합(EU)을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결정한 이래 약 6년 동안 보수당 소속 총리가 네 번이나 낙마하면서 보수당의 분열과 정부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떨어졌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지난 20~21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보수당(19%) 지지율은 노동당(56%)의 3분의 1 수준이다. 가디언은 “보수당은 수낵 전 장관이 경제문제를 해결해 낮은 지지율을 극복하고 2025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승리하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기대한다”고 꼬집었다.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인 수낵이 서민 생활고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심사다. 수낵은 의사 아버지와 약사 어머니 밑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억만장자 나라야나 무르티 인포시스 창업자의 딸인 악샤타 무르티와 결혼해 부부 자산이 7억3000만 파운드(약 1조1910억원)에 이른다. 전 세계 국가 수반 중 가장 부자가 될 수 있다.

영국 이브닝 스탠더드는 “노동계층 친구는 없다”는 발언과 물가 상승 억제를 주장하는 연설 때와 건설현장을 찾아갈 때 고가의 프라다 신발을 신고 가는 등의 행동으로 수낵이 일부 영국인에게 반감을 샀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수낵 전 장관을 지지하는 보수당 의원들도 그가 서민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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