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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차별·혐오마저 부인하나, 예의와 겸손함 갖추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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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치적 올바름(PC)’의 올바름에 대하여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위선보다는 대놓고 이기적인 게 낫다.’ 이게 요즘 MZ세대의 생각이란다. 매사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을 따지는 PC주의자들을 ‘프로불편러’를 지나 ‘PC충’이라는 경멸적 호칭으로 부른 지도 꽤 됐다.

서울대 사회학과 장덕진 교수는 얼마 전 한 신문 칼럼에 “5~10년간 한국인의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다”면서 “그게 드러나는 것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썼다. ‘말 한마디 잘못 했다 탈탈 털리는’ 독선적 PC주의에 대한 반감, PC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화적 창의성을 해친다는 반 PC 정서의 대두다.

우리 사회가 PC를 문제 삼을 정도로 충분히 PC적인가에는 이견이 있지만, 교조적 PC가 PC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PC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말이나 표현을 바로잡으려는 철학·운동을 의미한다.

문화전쟁과도 같은 ‘PC 논란’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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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논쟁은 해외도 예외 없다. 디즈니가 내년 개봉하는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흑인 가수 겸 배우 할리 베일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논란에 휩싸였다. 원작인 1989년 동명 애니메이션의 백인 인어공주를 흑인으로 바꾼 것이 원작 훼손이라는 불만이 쏟아졌다. “덴마크 배경 동화에 흑인 인어가 웬 말이냐”며 과거 흑인 배역을 백인이 연기했던 ‘화이트워싱’에 빗대 ‘블랙워싱’이란 표현도 나왔다.

예고편 속 흑인 얼굴을 AI 기술로 백인으로 바꾼 영상도 등장했다. 디즈니 측은 “덴마크 ‘사람’이 흑인일 수 있기에 덴마크 인어도 흑인일 수 있다”고 응수했다. 할리 베일리는 한 유튜브 영상에서 ‘흑인 소녀가 흑인 인어공주를 볼 수 있다는 것의 의미’를 강조했다.

PC 과잉에 대한 공세 더욱 거세
“위선보다 이기심이 낫다” 주장도

흑인 ‘인어공주’ 등 논란 불거져
“이념 앞세워 작품성 훼손” 비판

다양성 인정, 소수자 존중이 기본
독선·교조적 태도는 늘 경계해야

사실 디즈니야말로 그간 서구 동화 속 ‘백인 공주’라는 전형적 이미지를 만들어온 주역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배우 캐스팅과 서사에서 다양성과 포용·평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전원이 흑인 배우인 블럭버스터 ‘블랙팬서’, 여성 중심으로 새롭게 쓰인 ‘스타워즈’ 시리즈, 다양한 인종·문화·민족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등으로 이어졌다.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PC에 입각한 콘텐트 ‘다시 쓰기’ 전략은 소재 고갈에 빠진 할리우드가 찾은 출구전략이기도 했다. PC가 돈이 된다는 공식이 굳어졌다. 후발 주자인 넷플릭스도 다양성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반면 PC 추구가 지나쳐 창의성을 해친다거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하나둘 제기됐다. 1800년대 런던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로맨스 시리즈 ‘브리저튼’에는 흑인 왕비, 흑인 귀족이 주요 배역으로 나온다. 판타지물이지만 최소한의 역사성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PC 트렌드에 대한 백래시(반동)라는 측면과 끼워 맞추기식 소수자 캐스팅, 작위적 PC에 대한 반감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드라마 ‘우영우’도 몰매 맞아

최근 부산영화제에서 열린 영화진흥회 다양성 토크 ‘PC주의가 창의성을 얼어붙게 하는가’에 참석한 심혜경 한신대 교수는 현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백인 남성 중심의 ‘가족의 가치’를 텍스트의 중심에 두고 보수적인 세계관을 재생산한다고 비난받아오던 디즈니가 다양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감수성을 담아내면서 PC를 외치기 시작하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다양한 영웅들과 여성 히어로들이 맹활약하는 다른 세계를 예고하면서 ‘PC-페미니즘 논쟁’이 전 지구적으로 대두됐다.”

한편 국내에서는 자폐 장애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호평받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PC 논란에 휘말린 바 있다. 경쟁 관계인 거대 로펌의 대표 2인을 여성으로 설정하는 등 여성 배역의 전면 배치, 레즈비언 커플 에피소드, 속물적인 이대남 캐릭터 묘사 등이 여성 편향이라며 ‘PC 묻은 드라마’라는 공격이 나온 것이다.

반대로 ‘예쁘고 무해한’ 장애인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장애인의 현실을 미화하고,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을 연기하는 등 ‘당사자성’이 부족해 전혀 PC하지 않다는 비판도 나왔다. 양쪽 다 드라마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PC를 앞세웠다.

한편 지난 대선 기간 중 윤석열 대통령은 ‘장애우’란 단어를 썼다가 민주당으로부터 “장애인과 가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친구라고 배려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에 대한 우월적 시각을 드러내 차별이라는 얘기인데, 그게 ‘가슴에 비수를 꽂을 정도’인지 엄격한 PC 적용에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 방식을 문제 삼으면 무조건 혐오·반인권 세력, 차별금지법의 법리적 문제를 지적하면 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도 과도한 PC에 피로감을 갖게 하는 사례들이다.

국내 정치판선 ‘이대남’으로 번져

PC란 용어는 1960년대 미국 신좌파의 애독서였던 마오쩌둥의 『작은 빨간 책(Little Red Book)』에 나오는 ‘올바른 생각(correct thinking)’이라는 개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PC운동은 1980년대 미국 대학가에서 벌어진 소수자 인권운동의 논리였다. 성·인종·나이·성적 지향·외모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했다.

1990년대 들어 보수세력의 반발이 시작됐다. PC는 좌파의 전유물, ‘언어와 사상의 경찰’이라고 공격했다. 지난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된 미국 대선을 기점으로 진보 내부에서도 PC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민주당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반여성주의자·인종차별주의자·혐오주의자’로 몰아붙였지만, 정치적 의제 없는 PC 과잉이 오히려 반감을 사 선거에도 지고 대안 우파의 탄생을 도운 꼴이기 때문이다. PC와 정체성 정치가 실질적 사회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는 비판, PC가 새로운 근본주의로 변질하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들어 PC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됐다. 이후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안티 페미’ 정서가 위선적인 PC에 대한 반감,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을 만나며 ‘이대남’ 현상으로까지 이어졌다.

강준만 교수의 신간 『정치적 올바름』에 따르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PC는 진보·보수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이다. PC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며, 말과 행동이 달라 위선적이고, 구조적인 사회 변화를 방해한다는 이유에서다.

도덕적 자기과시 도움 안돼

그러나 과연 PC와 사회변혁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강 교수는 “경제에 집중하는 계급 정치와 (PC 등) 인정에 집중하는 문화정치는 상호보완 관계”라고 평한다. 그는 또 ‘도덕적 자기 과시 대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겸손한 PC’를 주문한다. ‘지적질’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게 PC의 운명이지만 매너가 필수라는 얘기다. 가령 미국의 PC운동은 자기과시와 인정 투쟁의 요소가 두드러져 진보적인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반감이 크다. 2018년 예일대 조사에서 심층 인터뷰를 한 3000명 중 80%가 “PC가 문제”라고 답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의 공동 저자인 영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프라이는 좌파이자 동성애자이지만 PC를 반대한다. “제가 궁극적으로 PC에 반대하는 이유는 평생 혐오하고 반대해왔던 것들이 PC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조의 개입, 경건한 체하는 태도, 독선, 이단 사냥, 비난, 수치심 주기, 증거 없이 하는 확언, 공격, 마녀사냥식 심문, 검열 등이 PC에 결합돼 있습니다.” 그는 또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커다란 실패는 효과적인 것보다 올바른 것을 선호하는 것”이라며 “PC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얼마나 옳은지에만 집착한다”고 꼬집었다.

물론 지금 우리 상황을 서구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문제다. 우리에겐 아직 더 많은 PC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단 문제는 도그마의 오류다. 독선과 오만이 된 PC는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향한 윤리적 열정을 간직하되, 그 열정을 ‘올바름’ 자체를 의심하고 상대화하는 데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 문학평론가 한영인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