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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기업인답지 않은’ 기업인을 주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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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왜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중요한가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주임교수·인간개발연구원 회장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주임교수·인간개발연구원 회장

1975년 공직에 입문한 필자는 2006년까지 공직에 있으면서 ‘공무원답지 않은 공무원’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그런가 하면 ‘검사답지 않은 검사’ ‘기업인답지 않은 기업인’이라는 표현도 제법 듣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언뜻 공무원이면 공무원다워야 하고, 검사는 검사다워야 하며, 기업인은 기업인다워야지, ‘답지 않다’는 말은 긍정적인 뉘앙스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맥에서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살펴보면 반드시 나쁜 뜻으로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는 동안 ‘답다’와 ‘답지 않다’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았다.

기업인이 돈만 바라보는 사람인가, 사회 공헌할 때 품격 높아져
주주 이익과 함께 종업원·고객·당국 등 이해 관계자 두루 살펴야
직업인은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에선 상식에 맞춰 처신해야
권력자도 권위 내세우기보다 민의 경청할 때 존경받을 수 있어

2500년 전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산 공자는 ‘사람답게 사는 길’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던 성인이다. 기원전 517년 30대 중반의 공자가 노나라의 내란을 피해 제나라로 갔을 때 제나라 경공(재위 기원전 547~기원전 490)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은 간단명료하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곧 정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치에 맞는 이름이 있는데 각자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처신하도록 백성을 다스리면 된다는 가르침이다.

‘답다’와 ‘답지 않다’의 긴장 관계

공자의 말에서 유추해보면 공무원다운 공무원, 검사다운 검사, 기업인다운 기업인이라는 말이 칭찬이지 ‘답지 않다’는 평은 칭찬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어찌해서 ‘답지 않다’는 말이 칭찬의 뉘앙스로 들리게 되었을까.

온 세상이 지금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이다. 이제는 기업도 주주 이익 극대화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지구 환경(Environment), 사회적 책임(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주 이익뿐 아니라 종업원·고객·당국 등 다른 이해 당사자의 관심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기업 부담의 증가가 따르는 만큼 기업들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3월부터 1975년에 설립된 인간개발연구원(HDI) 회장직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 바람에 지난 8월에는 ‘제39차 HDI CEO 정선포럼’에 참석하여 ‘사회 가치 경영으로 기업의 미래를 그리다’라는 주제로 ‘지구 환경과 지속 성장, 사회 공헌과 기업가치’에 대해 지혜를 나누었다. 이어서 지난달에는 ‘제17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2022’의 경제 분야 세션을 진행했다. 윌슨 화이트 구글 부사장을 초청해 ‘함께 사는 지구를 위한 기업의 역할과 통합’이라는 주제로 ‘지속가능한 지구에 대한 구글의 노력과 미래전략’을 들어보는 대담을 했다. 이어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등 기업인을 초청해 이윤 추구만이 아니라 사회 공헌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듣는 시간도 가졌다.

장기적 관점에서 존경받는 기업

이렇듯 정선포럼과 제주포럼을 진행하면서 오랫동안 고뇌하던 ‘답다’와 ‘답지 않다’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되었다. 기업 본연의 역할은 사람들을 고용하여(일자리 창출)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익을 내서(주주 이익 극대화) 나라 살림에 필요한 세금을 납부하는(납세)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기업인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하지만 부자가 된 기업인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다 존경하지는 않는다.

기업인이, 기업인답지 않게, 돈 버는 일이 아닌 사회 공헌을 할 때 사람들은 존경한다. 두 포럼에서 함께 나누고자 했던 지혜는 기업인이 ‘기업인답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기업에 품격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자진해서 세금을 더 내는 기업은 거의 없다. 법에서 정한 대로 납부하는 게 통례다. 그러므로 세금 납부는 ‘시켜서 하는 심부름’과 같다. 하지만 사회 공헌은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 하는 서비스’와 같다. ESG도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할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지속 성장과 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답다’와 ‘답지 않다’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좀 더 수월해진다. 기업인답지 않게 이윤만을 추구하지 않으면 단기적으로는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결국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기업, 고객이 다시 찾는 기업이 되는 지름길인지 모른다. 이렇게 보면 공무원·정치인·법조인 등 소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을 쥔 사람답지 않게 시민이나 유권자의 말에 마음을 열고 경청할 때 사람들은 ‘답지 않다’고 말한다. 이 경우 ‘답지 않다’는 평은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평가다.

소득 높아졌다고 행복해지지 않아

리처드 이스털린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1974년 ‘경제성장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난 후에는 예상과 달리 소득이 높다고 행복지수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규명한 논문이다. 이후 사람들은 이를 ‘이스털린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예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은행이 정한 빈곤선(1인당 국민소득 하루 1달러, 연간 365달러)을 돌파한 것은 1973년이다. 이어서 1977년에 1000달러, 1994년에 1만 달러, 2006년에 2만 달러, 2017년에 3만 달러를 넘어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그렇다면 행복지수도 그만큼 높아졌는가. 아니다. 2003년 이후 하루에 40명 정도가 매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야 할까. 인간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에서 참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필자의 소박한 생각이다. 공무원이든 기업인이든 어떤 직업인이든 본업은 이름값을 할 때는 ‘답게’ 행동하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처신은 ‘답지 않게’ 사회 공헌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교양인의 조건 “학교에선 교수님, 백화점에선 손님”

우리는 가끔 식당에서 큰소리로 말다툼하는 손님을 목격하곤 한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알아보지 못하고 여느 손님처럼 대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다. 이는 ‘다움’과 ‘답지 않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닐까 한다. 식당 주인 입장에서는 모든 손님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 온당한 처신이다.

골프장에서는 어떤가. 캐디에게 매너 없이 말을 함부로 하는 손님도 있다. 심지어 자기 직함을 불러주지 않는다고 캐디를 나무라는 손님도 있다. 골프장 손님은 누구나 ‘회원’ 아니면 ‘비회원’ 고객이다. 캐디가 사용하는 호칭은 ‘회원님’ 아니면 ‘고객님’이다.

직함은 어떤 사람이 본연의 업무를 수행할 때의 명칭이다.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할 때 교수다. 식당이나 백화점에서는 손님이고 비행기를 탈 때는 승객이다. 교수가 학생을 가르치거나 연구에 몰두할 때는 교수다워야 한다. 그 밖에는 ‘교수답게’가 아니라 개별 상황에 맞추어 ‘교양인답게’ 처신하는 것이 맞는 자세다.

우리나라는 빈곤을 벗어나 다이어트에 신경 써야 할 정도까지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그런 과정에서 과거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는 잃어버리고 물질만능 풍조가 생겨났다. 그 결과 자기보다 경제력이 처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한마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사라졌다.

지혜의 보물창고인 『논어』의 첫 구절은 학습으로 시작한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둘째 구절은 우정을 포함한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셋째 구절은 인격 수양에 관한 이야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不亦君子乎).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알아주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을 냈으면 『논어』의 세 번째 문장에 이 구절을 넣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내지 말고 ‘상황에 맞추어 교양인답게 처신’하라는 가르침을 남겼을까.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주임교수·인간개발연구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