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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 동화 뒤엎었다…봉준호가 픽한 감독의 '스칼렛'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된 영화 '스칼렛'은 이탈리아 출생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의 단편 소설 『스칼렛 세일즈』(1923)를 각색한 작품이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된 영화 '스칼렛'은 이탈리아 출생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그린의 단편 소설 『스칼렛 세일즈』(1923)를 각색한 작품이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왕자님이 하늘을 나는 돛단배를 타고 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는 공주님.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차마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프랑스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의 이야기라면 어떤가. 그리고 소녀가 왕자에게 구원받는 듯 보였던 이야기가 사실 그 반대였다면.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된 영화 ‘스칼렛’은 지극히 동화적인 이야기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영화 ‘마틴 에덴’(2019)으로 ‘향후 20년간 주축이 될 차세대 감독 20명’ 중 한 명으로 봉준호 감독의 지목을 받기도 한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마틴 에덴’에서 20세기 중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계급을 넘나드는 사랑 이야기를 그렸던 마르첼로 감독은, ‘스칼렛’에서는 여성을 향한 폭력과 마녀사냥이 여전했던 1차 세계대전 직후 노르망디를 배경으로 서사를 펼쳐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8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KNN 시어터에서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스칼렛'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이 8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KNN 시어터에서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스칼렛'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쟁 중 아내와 사별, 갓 태어난 딸 줄리엣(줄리엣 주앙)과 남겨진 라파엘(라파엘 티에리)은 어쩐 이유에서인지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으며 살아간다. 전쟁으로 자신이 마을을 비운 사이 아내가 당한 비극을 깨달은 라파엘은 뒤늦게 분노하지만, 주변의 냉대와 따돌림은 멈출 줄 모른다. 하지만 이 부녀는 좌절하는 대신, 아코디언과 피아노 연주를 친구 삼아 자신들만의 평화를 지켜내려 애쓴다.

성장한 줄리엣은 어느 날 숲속에서 만난 신비로운 노파가 들려준 ‘주홍 돛을 단 배가 널 데리러 올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희망을 품는다. 그리고 실제로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장이란 남자가 나타나자 한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장이 떠난 뒤 다시 불행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기적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줄리엣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영화 '스칼렛'의 주인공 줄리엣(줄리엣 주앙)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아버지와 살아가지만, 언젠가 '주홍 돛을 단 배를 타고 왕자가 올 것'이라 믿으며 꿋꿋이 살아간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스칼렛'의 주인공 줄리엣(줄리엣 주앙)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아버지와 살아가지만, 언젠가 '주홍 돛을 단 배를 타고 왕자가 올 것'이라 믿으며 꿋꿋이 살아간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영화의 원작인 1920년대 러시아 소설 『스칼렛 세일즈』(Scarlet Sails)는 ‘백마 탄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전형적인 구조를 취한다. 하지만 영화는 줄리엣이 운명의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소녀라면 소년보다 담대하라”고 힘차게 노래하는 장면 등을 통해 원작을 비틀었다.
8일 내한한 마르첼로 감독은 부산 해운대구 KNN시어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영화를 촬영하면서 줄리엣을 좀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번 영화가 데뷔작인 배우 줄리엣 주앙은 “원작에는 가진 것 없는 시골 처녀가 멋진 왕자를 만나 인생을 역전하는 스토리가 담겨있지만, 촬영을 하면서 줄리엣은 그런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원작을 자유롭게 각색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8일 부산 해운대구 KNN 시어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영화 '스칼렛'의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왼쪽부터), 배우 줄리엣 주앙, 라파엘 티에리. 연합뉴스

8일 부산 해운대구 KNN 시어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영화 '스칼렛'의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왼쪽부터), 배우 줄리엣 주앙, 라파엘 티에리. 연합뉴스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마르첼로 감독은 원작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실제 1차 세계대전 무렵의 아카이브 영상을 영화 곳곳에 삽입해 현실과의 연결점도 남겨뒀다.
‘마틴 에덴’에서도 비슷한 연출을 했던 그는 “아카이브 영상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큐 영화를 촬영한 경력이 많기 때문”이라며 “모든 영화가 이상과 현실을 오가는 면이 있지만, ‘스칼렛’은 원작 자체가 몽환적이다 보니 더 그런 느낌이 났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폭의 명화와도 같은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기도 하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다정하게 딸을 위로하는 아버지를 연기한 라파엘 티에리는 “감독과 전통적인 농촌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를 공유했다. 그 당시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도 존재하는 것”이라며 “딸에게 행복과 꿈을 전해주고 싶어 하는 아빠의 마음은 19세기에도,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줄리엣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다는 마르첼로 감독은 “원작을 보며 제 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며 “단순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빠와 딸에 대한 이야기에 매료돼 각색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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