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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투리땅 '얇은 집'에서 만난 도시의 역사와 내력[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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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잘못 없다
신민재 지음

도서출판 집

미국 뉴욕의 플랫아이언(flatiron·다리미) 빌딩은 독특한 생김새로 유명하다. 도로와 도로가 비스듬히 맞닿은 좁고 긴 삼각형의 땅 모양 그대로 삼각기둥처럼 얇고 날카롭게 서 있다. 뉴욕의 관광객들도 곧잘 찾는 랜드마크다.

이만큼 높거나 유명하진 않아도, 실은 한국판 플랫아이언이 제법 된다. 도로에 잘려나간 듯 쐐기꼴 땅에 얇은 조각 케이크처럼 서 있는 건물도, 앞에서는 몰라도 옆에서 보면 엄청 좁은 땅에 식칼처럼 서 있는 건물도 있다. 대개 동네 가게 등이 들어서 있어 무심히 지나치기에 십상이지만, 누구라도 한 번쯤 궁금해진다. 과연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됐을까.

서울 율곡로의 건물. 저자가 답사한 '얇은 집' 중 하나다. [사진 도서출판 집].

서울 율곡로의 건물. 저자가 답사한 '얇은 집' 중 하나다. [사진 도서출판 집].

이 책 『땅은 잘못 없다』의 저자는 이런 건물을 일부러 찾아다녔다. 언제 길이 나고 건물이 섰는지, 건물이 먼저인지 길이 먼저인지 나름의 추정과 함께 답사와 조사를 했다. 건축가답게 건축물대장·지적도·토지대장 등을 확인해 필지가 나뉘고 바뀐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물론 옛 지도와 시기별 항공사진까지 살폈다. 그렇게 책에 풀어낸 이야기는 건물 자체의 내력을 넘어 층층이 세월이 퇴적된 도시의 역사와 맞물린다.

예컨대 서울 수색의 작은 쐐기꼴 땅과 건물들은 경의선이 지나는 이 지역을 일제가 중일전쟁 시기 물류거점으로 삼으며 철도관사촌 등을 지은 역사, 한국전쟁 이후 서울역 앞 피난민 판자촌을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등의 역사와 90년대 일산 신도시 건설과 함께 도로를 넓히며 기존 건물들이 잘려나간 얘기까지 이어진다. 저자의 탐사는 때론 백 년 안팎을 훌쩍 넘는 얘기로 이어진다. 성내동 주꾸미 골목에서는 백제 시절까지 거슬러가고, 숭례문 앞 얇은 빌딩에서는 조선 초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든 연못 남지와 그 터의 변모를 드러낸다. 새문안로 작은 도장가게 건물에서는 600년 옛길과 세종문화회관 건설 때 확장된 50년 새 길이 맞물린다.

서울 숭례문 근처 세종대로의 빌딩. [사진 도서출판 집].

서울 숭례문 근처 세종대로의 빌딩. [사진 도서출판 집].

저자는 이 독특한 생김새의 건물들을 '얇은 집'이라 부른다. 곳곳에서 얇은 집의 내력을 추적하다 보면 종종 옛 물길과도 만난다. 서울 대학로 부근 흥덕동천과 반천, 서촌 부근 백운동천, 용산 부근 만초천과후암천, 정릉천 부근 월곡천 등은 복개공사로 사라지기 전의 자취를 지금의 도로들에 남겼다. 독립문 근처 영천시장 역시 만초천이 흐르던 자리란다.

서울 효창원로의 건물. [사진 도서출판 집]

서울 효창원로의 건물. [사진 도서출판 집]

이 책은 서울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 궁궐과 문화재만은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서울은 역사도 오래지만, 변화도 빠르다. 개발과 재개발이 숨 가쁘게이어진다. 1976년생인 저자만 해도 어린 시절 놀며 자란 안양, 과천, 서울 영동 등 세 곳의 아파트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얇은 집들은 개발과 도로의 비정한 상처를 보여주곤 하는데, 어쩌면 수백 수십 년 역사가 교차하고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는 이 도시의 현재형 단면을 가장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에는 경리단길 자투리땅처럼 상권이 번성하면서 새로 들어선 건물들도 나온다.

서울 은평로의 빌딩. [사진 도서출판 집]

서울 은평로의 빌딩. [사진 도서출판 집]

책에 실린 건물은 60여곳. 저자가 2년 전 페이스북에 관련 글 게재를 시작한 이래 제보받은 곳을 포함해 직접 답사한 곳 중 일부다. 모두 서울에 있다. 책날개에는 책에 싣지 못한 건물들의 스케치만 담았는데 울산·대전·부산·제주·전주·구미·경주 등을 아우른다. 얇은 집 탐사를 전국으로 넓히면 모르긴 몰라도 도시마다 책 한 권씩은 될 법하다.

책의 마지막에는 저자가 땅 주인 의뢰로 설계했던 '얇디얇은 집'이 어렵사리 완공된 얘기가 나온다. 저자가 누가 봐도 번듯한 땅에만 관심 있는 건축가였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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