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법원이 너무 늦었다"…'긴급조치 9호' 투옥 변호사의 한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Law談

Law談’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 OOO, 학원 강사, 징역 8년·자격정지 5년.
학원 국어강사로, 강의 중, “박정희는 군인 출신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 할 수 없다, 100억불 수출이라 하면서도 수입에 대해서는 은폐하고 있다, 정부에서 장려하는 것에 반대로 하면 잘 살 수 있다, 국어책은 정부 선전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언론의 자유는 없다”는 등의 발언을 함.

# OOO, 상업 종사, 징역·자격정지 1년 6월.
택시에서 "대의원 선거는 꼭두각시 놀음이다, 헌법 고쳐 유신헌법을 조작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함.

# OOO, 대학생, 징역·자격정지 1년 6월.
“유신정권은 긴급조치로 국민 기본권 억압, 정권 연장에 혈안되어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작성하여 교내에 배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일보 DB

대통령 긴급조치 9호 발령을 보도한 1975년 5월 13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일보 DB

1970년대 유신헌법 시절은 '공포의 시대'로 불린다. 골목이나 술집에서 나눈 말 한마디로 감옥에 가는 게 당연시됐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제9호를 공포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을 본격화했다. 제9호에는 앞선 긴급조치 제1호부터 제7호까지의 모든 내용이 집대성됐다. 헌법을 부정·비판하거나 개정·폐지를 청원·선동하는 행위, 학생들의 집회·시위·정치관여 행위 등이 금지됐다. 사실상 유신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막은 것이었다.

긴급조치 제9호는 이후 4공화국이 막을 내릴 때까지 4년 7개월 이상 유지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긴급조치 피해자는 1140명, 이 중 제9호 피해자가 970여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난 2013년에서야 긴급조치 위반으로 인한 전과가 사라지게 됐다.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는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위헌 선고를 하면서 재심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누명을 벗은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도 나섰지만, 대법원은 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아 왔다. 2014년에는 "긴급조치 9호를 처벌한 당시 수사기관이나 법관의 행위는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고, 2015년에는 "대통령은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에 대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폈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배석해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박정희 정권 시절 발령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과거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배석해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박정희 정권 시절 발령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과거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뉴스1

대법원의 이같은 태도는 47년 만인 지난달 30일 뒤집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 제9호 피해자 A씨와 가족들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2심 판결을 파기해 환송했다. "긴급조치의 발령 및 적용·집행이라는 일련의 국가작용이 전체적으로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때에는 국가의 배상 책임이 성립할 수 있다"며 과거 판례를 바꾼 것이다.

200여명 이미 패소 확정돼 구제 길 없어…"특별법 제정해야" 

전성 변호사가 19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전성 변호사가 19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전성 변호사(65·사법연수원 36기)는 본인이 긴급조치 9호 피해자이면서 다른 피해자가 낸 손해배상 소송 16건을 대리했다. 그는 지난달 국가배상 책임 인정 판결에 대해 "너무 늦었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사이 16건 중 14건은 패소가 확정돼 더는 국가 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 2015년 대법원 판결이 결정적이었다. 1심에서 승소했더라도 2심에서 2015년 대법원 판례를 들어 피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2015년 대법원 판결에 다 나와 있는데 뭘 청구하느냐"며 비아냥거린 판사도 있었다고 한다.

전 변호사는 "2015년 판결은 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 배상 책임을 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법리를 구성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고 명백히 밝히면서도 손해배상만 인정하지 않은 뒤틀린 판결"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법농단'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은 "상고법원 설치를 원하던 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협조를 얻으려는 차원에서 배상금 부담을 덜어줬다"고 봤다.

앞서 패소가 확정돼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는 2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 변호사는 "이들도 차별 없이 배상을 받을 수 있게끔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긴급조치 제9호 피해자들은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아 항소와 상고에 드는 소송비용을 대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며 "2015년 대법원 판결 이후 더 이상 소송하기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된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이 바뀌길 기다리며 사건을 쥐고 7년을 버틸 수 있는 피해자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렵게 재판을 이어간다 해도, 과거 자신을 고문한 형사가 법정에 나와 '모르쇠' 증언을 하는 것을 직접 마주하는 것도 피해자들에겐 또 다른 상처다.

김재형 전 대법관도 퇴임 직전 전원합의체 판결문에 입법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별개의견을 남겼다. "이번 판결에 긴급조치가 무효라고 더 강하게 판시하더라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더 크고 심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판결의 기판력에 따라 재판상 구제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형평의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여는 진정한 치유와 화해의 길"이라고도 했다.

옥살이 3번, 마흔 넘어 변호사 배지…"긴조 세대, 노년은 행복했으면"

전성 변호사가 19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전성 변호사가 19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전 변호사는 긴급조치 제9호로 투옥됐던 당사자다. 고려대 77학번인 그는 그야말로 '긴조 대학시절'을 보냈다. 3학년이던 1979년 6월,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앞서 유신 반대를 외치다 연행됐다.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던 도중 진중권 광운대 교수의 누나인 진회숙 음악평론가 가족의 도움으로 도피생활을 했지만, 결국 다시 체포돼 구속됐다. 성북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어느날, 신문 호외가 갑자기 날아왔다. 10월 2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 해 12월에 긴급조치 제9호도 해제되면서 그도 풀려났다.

이후에도 옥살이는 2번 더 했다.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광주 학살에 항의해 계엄령 위반으로 1년간 투옥됐고, 1992년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경실련 기획실장을 맡는 등 시민운동을 하다 마흔이 넘어 사법고시에 도전해 2004년 합격했다.

그가 노동운동으로 재판을 받을 땐 김선수 대법관이 과거 변호를 도왔다. 전 변호사는 김 대법관이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문에 쓴 별개의견을 가장 인상 깊은 대목으로 꼽았다. 김 대법관과 오경미 대법관은 긴급조치 시대의 법관들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이들은 "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회전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법관은 바퀴에 달린 톱니 하나에 불과해 톱니바퀴와 함께 회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물으며, "법관이 제동장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전 변호사는 '긴조 9호 세대'들이 젊은 시절의 힘을 다시 떠올리며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검열의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이들이 끝나지 않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침잠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이들의 망가진 인생을 당연하게 여긴 채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질문에 눈을 감고 얼굴을 감싸면서도, "남은 사람들의 노년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반복해 이야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