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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가슴은 죄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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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경희 EYE팀 기자

김경희 EYE팀 기자

지난해 캐나다에 사는 한국 교포가 자신의 딸과 손주라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길거리에서 한쪽 가슴을 드러낸 채 수유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인파가 붐비는 곳도, 그렇다고 외진 곳도 아닌 카페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수유를 하고 있었다. 배경에 찍힌 행인들도 이상야릇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 같은 이 장면을 한국사회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다. 지난 한 해 1년간 모유 수유를 하면서 직접 마주한 현실이다. 모유만 고집하는, 심지어 젖병도 거부하는 아이와 외출할 때 수유가리개는 필수였다. ‘젖먹던 힘까지’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아이는 온 힘을 다 쓰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데 한여름에도 보자기 같은 이 물건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결국은 차 안에서 에어컨을 켜 놓고 불편한 자세로 수유할 때가 많았다. 맘 편히 커피를 마셔보고 싶어서 쾌적한 수유실을 구비한 인천 영종도 카페까지 찾아간 적도 있다. 비위생적인 공중 화장실에서 젖을 먹이거나 유축을 했다는 경험담 앞에선 말도 못 꺼낼 에피소드지만 말이다.

2017년 5월9일 호주의회 본 회의장에서 라리사 워터스 상원의원이 생후 2개월 딸에게 모유를 수유하고 있다. [사진 워터스 의원 트위터]

2017년 5월9일 호주의회 본 회의장에서 라리사 워터스 상원의원이 생후 2개월 딸에게 모유를 수유하고 있다. [사진 워터스 의원 트위터]

외국에선 공공장소에서의 모유 수유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한 편이다. 2013년 호주 시드니에선 젖을 먹이는 여성을 제지한 카페 앞에서 엄마들이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프랑스에선 한 여성이 우체국에서 생후 6개월 아들에게 젖을 먹였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자 엄마들이 SNS상에 모유 수유 사진을 올리며 인식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

더디지만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2017년 5월 호주 연방의회에서는 라리사 워터스 상원의원이 사상 처음으로 본회의장에서 생후 2개월 딸에게 모유 수유를 해 화제가 됐다. 1년 전 법령을 개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럽연합(EU), 뉴질랜드, 미국 의회도 수유가 필요한 영아와의 동반 입장을 허용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캐나다 유콘 준주 화이트호스는 법으로 공공장소에서 젖 먹일 권리를 보장한다.

2022년 대한민국은 어떤가. 국회 사상 세 번째로 임기 중 출산한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지난해 5월 수유가 필요한 24개월 이하 영아가 회의장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반짝 관심을 끌었을 뿐 법안은 1년 넘게 국회 운영위에 계류돼 있다. “노상 방뇨보다 길거리 모유 수유가 더 비난받아야 하나” “여성의 가슴을 지나치게 성적 대상화하지 말라”는 외침엔 ‘꼴페미’ ‘노출증’ 낙인찍기 바쁘다. 합계출산율(지난해 0.81명) 세계 꼴찌 국가의 부끄러운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