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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바보를 ‘찐’ 바보로 만드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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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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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얼마나 많은 아빠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까. 올해 외국어고 입시 평균 경쟁률이 1대1 이하로 낮아질 것이라는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외고·자사고·일반고 등 후기 고교 입학 원서 접수는 12월 7일 시작된다. 중3 자녀를 둔 아빠라면 외고·자사고 진학에 대한 판단에 직면할 것이다. 평균 경쟁률이 1.37대1(2020학년도)→1.04대1→0.98대1로 3년간 하락세라는 뉴스를 보고 아빠는 뭐라 답했을까. “외고 진학 어렵다던데 이젠 쉽게 갈 수 있겠네?” 혹시 이런 생각하셨다면, 아버님 그 입 전적으로 닫으셔야 합니다.

아빠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식 시장에 비유하자면 최근 외고는 하한가, 과학고는 상한가다. 이유는 복합적이며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 이후 교육 공정성 훼손의 주범으로 전락한 외고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폐지 대상이 됐다. 학부모 반발로 잠시 주춤한 상황이지만, 대수술이 불가피하다. 여기에 문·이과 통합 수능이 입지를 더욱 좁혀놨다. 수학 점수에서 유리해진 이과생들이 ‘문과 침공’에 나서자 내신 따기 어려운 외고를 기피하게 됐다. 애당초 명문대가 목표였지, 외국어 좋아서 선택한 학교는 아니었으니까.

윤석열 정부의 외국어고 폐지 방침에 반대하는 전국외고학부모연합회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정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외국어고 폐지 방침에 반대하는 전국외고학부모연합회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정책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윤 대통령이 반도체 등 기술 인재 양성을 선포하면서 과학고 경쟁률은 3대1 수준에서 4대1 이상으로 올랐다. 들쭉날쭉 수치를 보면 주식 시장 비유가 오히려 적절해 보인다. 자식 교육을 놓고 도박하는 심정이 될 줄 아빠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맥락을 모르는 아빠는 속수무책, 그런 아빠 대신해 스펙 관리하던 엄마는 멘탈붕괴다. 가족의 위기 앞에 한때 딸바보였던 아빠는 ‘찐(眞)’바보 인증을 받았다.

아들 인터넷 시험을 대신 치러주는 똑똑하고 성의 있는 엘리트 아빠가 공존하기에 더 바보 같아 보이는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 나 역시 동병상련의 바보였다. 문재인 정부가 ‘대입 공정성 강화’ 방안이라며 수시 축소와 정시 확대를 외칠 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일반고 문과 우등생이었던 딸은 수시 모집을 준비하느라 발버둥 치고 있었건만…. 결국 수시 축소와 문과 침공의 피해를 온몸으로 겪는 딸을 지켜봐야 했다. 딸아, 아빠가 많이 미안하다. 미리 알았어도 별수는 없었겠지만.

자동차 살 때도 붙는 교육세 성실히 납부했고, 수십 개 학원에 학원비·교재비 꼬박꼬박 바쳤다. 그 학원 일타강사가 수백억원대 강남 부동산을 현금 매수해도 배 아파하지 않았는데, 자식에 미안한 상황만큼은 아빠들은 참기 힘들다. 윤석열 정부 출범 100일이 넘도록 공석인 교육부 장관 자리에 오실 분은 딸바보의 눈물을 이해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