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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1350원도 깨져…바닥 몰라 더 무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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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외환시장이 폭풍 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다. 29일 미국 달러당 원화가치는 1340원과 1350원 선을 단숨에 뚫고 추락(환율 상승)했다. 1350.4원으로 마감했는데 전 거래일(지난 26일) 대비 낙폭은 19.1원에 달한다. 원화값은 금융위기 후폭풍이 한창이었던 2009년 4월 이후 1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이날 방기선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시장상황점검회의에서 “시장에서 과도한 쏠림 현상이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구두 개입성 발언을 했고, 외환 당국이 실제 매도(달러화를 팔아 원화가치 상승을 유도하는) 개입에도 나섰지만 1350원 돌파를 막지 못했다. 원화 투매가 이어지며 장중 1350.8원을 찍기도 했다.

국내 증시도 바짝 움츠러들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2.18% 내린 2426.89에 마감했다. 삼성전자가 2.33% 내려 ‘5만전자’로 떨어지는 등 시가총액 상위 종목 대다수가 하락했다. 코스닥도 2.81% 하락한 779.89에 장을 마쳤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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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추가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총재는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가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추가 빅스텝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뒤 “물가상승률이 5%를 크게 웃돌 경우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처럼 한은도 물가 안정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바닥은 아직’이란 공포가 시장에 번지고 있다. 지난주 잭슨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Fed 의장이 ‘매파 본능’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금융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달러화 몸값은 치솟고 원화가치는 속절없이 추락 중이다. 환율 수준만 놓고 보면 이미 금융위기급이다.

물론 2007~2008년 금융위기 때와 견줘 한국의 경제 기초체력(펀더멘털)은 확연히 나아졌다. 올해 상반기 경상수지는 248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유럽 에너지위기 등 복합 악재…“원화값 연말께 1400원 근접할 수도”

2007년과 2008년 2년 연속 경상수지 적자(상반기 기준)였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올 7월 말 외환보유액은 4386억 달러로 금융위기 때의 2배 안팎에 이른다. 1년 이내에 갚아야 하는 단기외채 비율은 6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 대비 41.9%로 10년래 최고 수준이긴 하지만 2007년 63.3%, 2008년 74%를 크게 밑돈다.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인 외국환평형기금채권(5년물 기준) 스프레드 역시 올 1~6월 평균 38bp(1bp =0.01%포인트)로 아직 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외평채 스프레드는 미국과 한국 국채 간 금리 차이를 뜻하는데, 국가 신용도가 낮을수록 수치는 올라간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외평채 스프레드는 연평균 404bp에 달하기도 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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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시경제 지표를 근거로 정부는 경제위기론에 선을 긋고 있다.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제기구나 미국 등 주요국에서 한국을 평가할 때 외환 건전성에도 문제가 없고 충분한 외화보유액도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평가한다)”며 “무역수지 적자가 곧바로 경상수지 적자를 증폭시켰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 위기와 양상이 다르고 거시 건전성 지표가 양호하다는 이유로 섣불리 안도할 상황은 아니다. 똑같은 형태의 경제위기가 반복된 적은 한 번도 없어서다. 한국 경제를 휘청이게 한 1970~80년대 오일쇼크,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모두 달랐다. 원인, 충격 강도와 범위, 회복 기간은 제각각이었다.

외환위기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일부 국가의 문제였고, 금융위기는 미국 내부의 부동산·금융 부실이 진앙이었다. 이번엔 다르다. 코로나19 후폭풍, 공급망 교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기록적 가뭄 등 여러 위험 변수가 한꺼번에 닥쳤다. 유럽·일본·중국 등 선진·신흥국 가리지 않고 영향권에 있다.

한국도 물론이다.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5%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폭풍의 한가운데 있다. 정부 경계감도 이전보다 한층 높아졌다. 방 차관은 이날 회의에서 “최근 한국 금융시장이 미국 등 주요국 금융시장과 동조화가 심화한 측면이 있으므로 당분간 시장 상황에 대한 주의 깊은 모니터링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장 전문가는 원화값이 당분간 약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위원은 “Fed의 고강도 긴축과 유로화 약세로 달러 강세 요인이 한동안 지속할 것”이라며 “달러 강세가 원화가치 하락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일차적으로 원화값이 달러당 1370원 선까지 밀려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 역시 “달러 강세에 유럽 에너지 위기나 중국발 부동산 경기 침체 우려 등 각종 변수가 겹치면 연말께 원화값은 하단 기준으로 달러당 1400원 선까지 근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는 환율 자체보다는 경기 둔화에 취약한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 외환·금융위기 때보다 크게 불어난 가계부채 등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외화 유동성 지표를 살펴보면 지금의 원화가치 급락은 이전 위기 때와 같은 달러화 부족 등 유동성 문제에 기인한 건 아니다”며 “금리를 거꾸로 내리고 있는 일본의 엔화를 제외하곤 한국 원화가 주요국 통화 중 가장 많이 하락하고 있는데,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미국의 긴축으로 인한 성장 둔화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돼 있다는 대외 인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어 “현재 한은이 미국 Fed를 따라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외환시장 안정엔 기여할지 몰라도 가계부채 상환 위험이 커지는 게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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