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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병상의 퍼스펙티브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가 촉발한 반도체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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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50년 동안 지정학(geopolitics)은 석유가 어디에 매장돼 있는지에 따라 정의됐지만, 앞으로의 50년은 칩(반도체) 제조공장의 위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미국 인텔 CEO 패트릭 겔싱어가 지난 5월 다보스포럼에서 한 말이다. 앞으로는 ‘반도체칩이 어디서 만들어지나’가 국제정치의 결정적 변수가 된다는 의미다.

반도체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국제사회의 양대 사건(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에서 반도체의 지정학이 이미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네티즌들이 공유 중인 '성스러운 재블린 미사일'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 [트위터 캡처]

우크라이나 네티즌들이 공유 중인 '성스러운 재블린 미사일'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 [트위터 캡처]

재블린 정밀타격, 러 탱크 무력화

지난 2월 러시아 탱크부대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던 당시 며칠만에 수도 키이우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키이우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탱크부대를 무력화한 1등 공신은 미국 미사일 재블린(FGM-148 Javelin)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수호 성인’이란 의미로 ‘세인트 재블린(Saint Javelin)’이라 부른다.

I재블린 미사일 발사 모습. 미사일 앞부분의 적외선추적 카메라가 탱크를 찾아간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제공. AP 연합뉴스.

I재블린 미사일 발사 모습. 미사일 앞부분의 적외선추적 카메라가 탱크를 찾아간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제공. AP 연합뉴스.

‘투창’이란 뜻처럼 재블린은 개인화기다. 정밀타격이 가능한 적외선유도방식 대전차미사일이다. 정확성은 고화질 적외선카메라와 유도시스템 덕분이다. 1991년 개발됐지만 고성능 칩 250개로 업그레이드, 첨단무기가 됐다. 공중으로 쏘면 미사일이 자체 추진력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2km 떨어진 탱크를 찾아 급강하, 포탑을 관통한다.

재블린은 한 발에 1억원 고가품이다. 하지만 ‘원 샷, 원 킬’(One Shot, One Kill)로 수십억짜리 탱크를 폭파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같은 평원에서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미국은 2018년 이후 재블린을 우크라이나에 집중원조했다.

반면 러시아의 형편 없는 IT능력도 재블린 성공의 배경이다. 러시아 주력 탱크인 T-72나 T-80만 아니라 최신형 T-90까지 모두 미사일 대응능력이 형편 없었다. 탱크부대에 앞서 주변을 정찰하는 드론도 없었다. 통신은 여전히 구형 무전기를 이용해 실시간 도청당했다.

지난 7월 우크라이나 전쟁중 수거된 러시아 미사일에서 발견된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사 제작 반도체칩. 1988년에 만들어진 제품이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7월 우크라이나 전쟁중 수거된 러시아 미사일에서 발견된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사 제작 반도체칩. 1988년에 만들어진 제품이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한편 러시아군의 레이다, 미사일, 공격헬기 등에선 미국 반도체칩이 대거 발견됐다. 모두 가전제품에서 사용하는 정도의 저사양 제품이었다. 국제밀매조직을 통해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소련(러시아)에 대한 IT관련 수출을 통제해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교훈은 명확하다. 반도체칩 등 첨단기술이 전쟁을 좌우한다. 첨단기술통제는 글로벌 헤게모니 유지에 필수다. 러시아에 대해선 성공했다. 남은 건 중국이다.

코로나가 불러온 반도체 대란

코로나는 경제산업측면에서 반도체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로 자가격리과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전자제품 수요가 폭증했다. 여기에 들어가는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전세계 생산의 절반을 대만 TSMC가 맡고 있다. TSMC는 코로나로 외부활동이 줄어들었기에 자동차 수요도 줄 것으로 예상했다.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줄이고 컴퓨터ㆍ스마트폰용 생산에 집중했다.

그런데 전기차 수요가 늘어나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다. 전기차는 2000개 이상 첨단반도체가 필요하다. (휘발유차량은 300개 내외) 차량용 반도체 대란이 일어났다. 미국 산업계에서도 자국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확보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반도체생산 아시아편중 안된다

인텔 CEO 겔싱어가 다보스에 주장한 반도체 지정학의 결론도 ‘반도체 생산의 아시아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이다. 현재 전세계 반도체의 80%가 아시아에서 생산된다. 시스템반도체는 대만의 TSMC, 메모리반도체는 한국의 삼성이 대표적이다.

30년간 가중돼온 아시아 집중은 시장의 논리이자 미국의 전략이었다. 반도체 모국인 미국의 기업들은 1980년대까지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두 직접 다 했다. 그러다 반도체산업이 커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미국 기업들은 생산에 필요한 인건비와 시설투자 부담을 덜기위해 외주를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위탁생산(파운드리) 전문기업으로 등장한 곳이 TSMC다. 삼성도 이런 흐름에 올라탔다. 대만과 한국은 국가차원의 전략투자가 가능했기에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세계반도체 위탁생산의 절반을 맡고 있는 대만 TSMC는 국가차원에서 전략투자한 기업이다. 사진은 TSMC로고. 연합뉴스

세계반도체 위탁생산의 절반을 맡고 있는 대만 TSMC는 국가차원에서 전략투자한 기업이다. 사진은 TSMC로고. 연합뉴스

국제정치의 변화도 작용했다. 1980년대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미국은 글로벌 단독패권을 장악했다. 반도체 공급망의 글로벌 분산이 가능했다. 대만과 한국에 반도체 생산을 맡기는 것이 외교안보차원에서 위험하지 않았다.

그랬던 반도체 공급망의 아시아 의존이 문제로 부각된 것은 기본적으로 중국 때문이다. 시진핑 시대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장을 던졌다.

중국은 2015년 ‘제조 2025’라는 그랜드전략을 내놓았았다. 그 첫번째 전략목표가 ‘반도체 굴기 2025’다. 2025년까지 반도체 70%를 자급자족하겠다는 목표다. 국가차원 기금(10년간 200조)을 쏟아붓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의 견제로 목표미달이다. 대표적인 예가 2019년 통신업체 화웨이에 대한 제재다. 미국 기술을 이용한 모든 제품을 화웨이에 팔지 못하게 했다. 대만의 TSMC가 시스템반도체 납품을 중단함으로써 화웨이는 사실상 세계무대에서 사라졌다. 화웨이는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자체 반도체생산능력을 갖추기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첨단 기술의 결집체인 반도체의 경우 자력갱생엔 상상 이상의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미 반도체법, 이례적인 초당협력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쐐기를 박았다. 8월9일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법(Chips and Science Act)’에 서명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반도체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미국에 반도체생산공장을 세우는 기업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인데, 사실은 중국의 반도체굴기를 가로막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 [UPI=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반도체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미국에 반도체생산공장을 세우는 기업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인데, 사실은 중국의 반도체굴기를 가로막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 [UPI=연합뉴스]

반도체법이 만들어진 과정부터가 최근 국제정치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법안검토가 시작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 시절인 2020년부터다. 상하원이 각각 법안을 내놓았으나 실효성 논란이 적지 않았다. 현재의 글로벌 공급망이 더 시장친화적이며 효율적이란 반론이 많았다. 바이든의 말처럼 ‘중국의 반대 로비’도 작용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고 반도체 대란이 돌출하면서 반대논리가 잦아들었다. 상하 양원의 논의가 점점 ‘반도체법 강화’쪽으로 흘렀다. 그 결과 양극화된 미국의회에서 보기 드물게 초당적 지지를 받아 법안이 통과되는 이변을 낳았다.

골자는 연방재정 2800억 달러(약 370조원)를 반도체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핵심은 그중 390억 달러(약 52조원)를 미국내 반도체 제조시설을 만드는 회사에 보조금으로 주겠다는 대목이다. 반도체 생산시설을 미국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을 겨냥했다. 이미 두 회사는 미국에 공장을 지었고, 짓고 있으며, 더 짓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보조금은 부차적인 문제다. 생존의 문제다. 미국의 요구에 부응해야 기술ㆍ장비ㆍ소재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미국의 규제도 받아야 한다. 10년간 중국에 첨단 반도체 관련 투자를 못한다. TSMC는 난징, 삼성은 시안에 반도체공장을 운영중이다. 신규투자를 못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공장문을 닫아야한다. 미국과의 협력은 곧 중국봉쇄를 위한 반도체 동맹(칩4)가입을 뜻한다.

가장 위험한 나라 대만

미국 입장에선 특히 대만 TSMC가 걱정이다.

TSMC는 세계 반도체 위탁생산 절반을 맡고 있는 최대 파운드리다. 미국 무기에 사용되는 시스템 반도체도 거의 도맡고 있다. 최첨단 생산능력을 자랑한다. 그런데 지정학적으로 너무 취약하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10월 당대회(공산당전국대표대회)에서 3연임이 확실시된다. 마오쩌뚱과 덩샤오핑 이후 처음이다. 그가 혁명지도자급 반열에 오르기위한 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대만 흡수통일’이다. 물론 평화적인 방법, 일국양제(하나의 국가, 두개의 체제)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홍콩에 대한 강압적 조치를 본 대만인들은 ‘일국양제’를 의심한다. 마침내 시진핑도 ‘무력불사’의지를 감추지 않는다. 지난 3일 미국 펠로시 하원의장의 방문 이후 대만을 포위한 실사격훈련으로 사실상 섬을 고립시켰다.

시진핑 입장에서 대만 TSMC는 반도체굴기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여의주나 마찬가지다. 시진핑의 3번째 임기가 끝나는 2027년은 마침 인민해방군 창군 100주년이다.

그래서 대만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꼽힌다. 지정학적으로 대만과 가장 비슷한 나라가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