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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영의 퍼스펙티브

개인 계좌에 직접 돈 넣는 싱가포르 방식 추진할 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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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발등의 불’ 국민연금 개혁

김진영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경제분과 위원

김진영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경제분과 위원

새 정부의 핵심 정책 과제인 국민연금 개혁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주된 관심은 재정 안정화에 쏠려 있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로 연금 보험료를 내야 할 젊은이의 수가 빠르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연금 재정 문제는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중요한 이슈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제도는 단순히 재정 문제 해결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연금 제도의 특성을 알아야 이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효과적 개혁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일반 국민 대상의 국민연금제도는 1986년 개정한 국민연금법에 따라 88년부터 실시되었다. 당시 정부는 연금 재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즉시 제도를 시작하기 위해 부과 방식(pay-as-you-go) 시스템을 채택했다. 부과 방식이란 그 해에 젊은 노동자가 낸 보험료를 모아 나이 든 은퇴자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이다. 수지 차액이 없기에 자동으로 재정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근로자·고용주가 월급 일부를 개인 저축계좌에 의무적 불입
노후 대비는 물론 주택 구매, 의료비, 교육비 등으로도 사용
55세 이후 퇴직 계좌로 이전돼 65세부터 연금 형태로 받아
젊은 세대에 짐 떠넘겨 출산율 낮추는 현 제도 부작용 줄여

우리보다 앞서 부과 방식을 시행한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에 이미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연금 재정 문제를 우려하기 시작해 젊은 노동자가 많은 시기에 보험료를 적립해 두었다가 나중에 은퇴자가 많아질 때를 대비하는 연금기금을 설립했다. 이 문제를 인지한 한국 정부도 부과식 국민연금제도에 더해 적립기금제도를 추가로 시행하게 된다.

2057년 국민연금 수령자, 납부자 추월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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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기금은 2041년까지 수입이 지출을 앞지르기 때문에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노령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결국 보험금 지급을 크게 확대해 2057년 기금이 고갈될 전망이다.(보건복지부 추계) 물론 기금이 고갈돼도 은퇴자가 연금을 전혀 못 받는 것은 아니다. 부과 방식에 따라 그해 걷은 보험료를 나누어 받으면 된다.

문제는 2057년 이후 연금 보험료를 내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워낙 많아져 부과 방식으로 나누어 주는 연금액이 너무 적어진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은퇴하는 세대는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제시되는 대책의 핵심은 보험료율을 높여 연금 수입을 늘리고 수급 나이를 높여 연금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다. 수입과 지출을 얼마나 변화시키느냐에 대한 여러 이견이 있을 뿐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재정 문제를 넘어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첫째는 국민연금이 어떤 기능을 가지며 무엇을 대체하고 있느냐는 점에 기인한다. 국민연금 시행 이전에 개인 노후 소득을 확보하는 방법은 본인 저축을 제외하면, 자녀의 지원뿐이었다. 자녀의 부모 노후 지원은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과 비교해 금전적 지원 비중은 줄었지만, 요즘의 자녀들도 부모 돌봄이나 의료서비스에 많은 시간을 쓴다.

국민연금이 저출산과 높은 이혼율에 영향

국민연금은 이같이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던 노후 생활 보장 기능을 공공부문이 일부 대체함에 따라, 가족 역할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부과식 시스템에서 연금 수령액은 본인의 자녀가 보험료를 얼마나 내느냐와 상관이 없고, 다자녀를 두어 미래 납부자를 많이 만든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 가족 제도 아래에서는 노후의 윤택한 삶을 위해서 많은 자녀를 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만, 부과식 국민연금제도에서는 절대 유리하지 않다. 이는 부과식 연금제도가 가족을 이루어 자녀를 갖고자 할 유인을 줄이게 한다는 뜻이다.

지난 20년 동안 많은 연구는 부과식 연금이 출산율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2007년 57개국의 자료를 분석한 논문에서 각국의 국민연금 규모가 출산과 결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검증했다. 그 결과 연금 규모가 큰 나라일수록 출산율이 낮으며, 이혼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국제 논문들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 연구가 공통으로 시사하는 바는 최근 국내 저출산과 높은 이혼율 현상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가 국민연금이라는 점이다. 물론 저출산·고이혼율의 원인은 다양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로 출산의 기회비용이 커진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보이는 한국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들 연구는 국민연금의 재정 문제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저출산에 의한 세대 간 연금 수령의 불균형 대책으로 현재 정치권에서 제시하는 해법은 보험료를 높여서 국민연금 규모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연금 규모 확대는 출산율을 낮추고 연금 납부자 수를 더욱 줄여, 연금 재정 고갈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책 따라 연금 자산 가치 줄 수도

부과식 국민연금이 지니는 두 번째 문제점은 자산 가치의 불확실성이다. 은퇴 생활을 위해 사적으로 저축하는 경우, 우리는 현재의 저축 규모를 계좌 잔고 조회를 통해 쉽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자산 액수에 근거해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더 많은 저축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고 은퇴 후 생활에 대해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경우 본인이 얼마만큼의 연금 자산을 적립한 셈인지 알 수 없고, 은퇴 후 얼마만큼의 연금액을 받을 것이지 확신할 수 없다. 미래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최악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본인이 국민연금에 낸 총액을 알고 있고,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에 가면 본인이 은퇴 후 받을 예상 연금액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고 최종적으로 은퇴 후 받게 될 금액은 정치적 결정 과정을 통해 정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거론되는 보험료 인상과 수급연령 상향 정책이 현실화하면 우리가 받게 될 연금 수령액은 예상치와 큰 차이가 날 것이다. 미래 은퇴 생활을 대비하는 데 현재 자산이 얼마만큼 모였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안심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겠는가. 정부의 선처나 미래세대의 희생만을 기대하면서 어떻게 내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겠는가.

보험료 인상, 수급연령 상향은 단기 조치

국민연금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혁이 필요할까. 보험료 인상과 수급연령 상향은 부과식 연금제도에서 재정 문제를 극복하는 데 단기적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출산과 자산 불확실성의 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 재정 건전성 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싱가포르식 공공적립금 제도를 고려해볼 만하다. 이 제도는 정부에 의한 강제 저축의 성격을 가진다. 정부는 개인별 저축 계좌를 개설하고 근로자와 고용주는 각자 소득의 일정 비율을 근로자의 계좌에 입금한다. 입금된 돈은 근로자의 선택에 따라 정부나 민간 금융기관이 운영할 수 있고, 55세가 되면 퇴직 계좌로 이전돼 은퇴 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다.

저축 계좌에 있는 돈은 55세 이전에도 주택 구매, 의료비, 교육비로 사용할 수 있다. 반면 퇴직 계좌에 있는 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65세부터 연금으로 수령하게 된다. 싱가포르식 연금제도를 성공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투명성·정보력·행정력이 필요한데, 한국은 이 측면에서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 연금제도는 부과식과 달리 가족의 역할이나 출산을 줄이는 효과가 없고, 연금자산 파악도 용이하다.

지속가능한 국민연금 개혁 필요

싱가포르식 제도를 도입하면 초기에는 기존의 부과식 제도와 이원화된 상황이 될 것이고, 이 과도기 동안 재정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새 제도 도입 이후 납입된 돈은 모두 개인 계좌에 적립되므로 이미 부과식 제도에서 납부된 보험료에 상응하는 연금 지급액은 개인 계좌에 저축된 돈으로 지원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부과식 제도에서 납입된 보험료에 대한 연금 지급액은 현재 적립된 기금에서 나누어 줄 수밖에 없다. 이 기금으로도 부족할 수 있는데 이때는 정부의 일반세수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일반세수 지원은 현 부과식 제도를 계속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기금 고갈 후 피해갈 수 없다.

새 제도를 시행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고통을 조기에 겪고 보다 확실한 미래 대안을 가지게 하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현재 많이 쌓여있는 기금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새 제도로의 이행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물론 국민연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국민이 충분히 이해하고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김진영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리셋 코리아 경제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