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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지영의 퍼스펙티브

고고학선 똥도 소중한데…고압세척에 씻겨나간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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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훼손된 김해 고인돌이 뼈아픈 이유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세계 최대 규모의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지자체의 복원·정비 작업 과정에서 훼손됐다. 경남 김해시가 2020년 12월부터 ‘구산동 지석묘(支石墓·고인돌)’에 대한 정비 공사를 하면서 묘역 바닥에 깔려있던 박석(薄石·얇은 돌)들을 모조리 걷어내 고압세척을 해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박석 아래 청동기 시대 문화층(유물 존재 가능성이 있는 지층)도 훼손됐다. 원형 유지가 제1원칙인 문화재 관리의 기본을 무시한 처사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 유적
청동기시대 박석 마구 뒤엎어

옛 돌과 ‘새 돌’ 섞어 묘역 단장
박석 아래 문화층도 복구 불가능

사료 빈약한 가야사 연구에 손실
허술한 문화재 관리 그대로 노출

이 사실은 김해시의 국가 사적 지정 신청서를 접수한 문화재청이 현장 조사를 하면서 드러났다. 깨끗이 ‘세척’한 기존 돌과 어디선가 가져온 새 돌을 섞어 묘역 바닥을 다시 깔고 있는 모습을 문화재위원들이 보고 화들짝 놀라 김해시에 공사 중지를 통보한 게 이달 1일이다. 그때까지 현장의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정비 공사를 진행한 호연종합건설이 국가자격증인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을 갖춘 문화재 전문 수리업체라 하니 더욱 충격이다.

마구잡이 훼손에 사적 가치 잃어

지난 11일 찾아간 구산동 지석묘에선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현장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훼손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 여론이 일자 김해시는 지난 8일 사적 지정 신청을 철회했다. 문화재위원회의 이재운 사적분과위원장은 “진정성·역사성에 심대한 훼손이 이뤄진 상황이라 이미 사적 지정 가치를 잃었다. 어떻게 이렇게 마구잡이로 훼손할 수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며 한탄했다.

경남 김해 구산동 지석묘의 복원ㆍ정비 공사 이전 상태. 상석을 중심으로 박석이 깔린 묘역이 조성돼 있다. [연합뉴스]

경남 김해 구산동 지석묘의 복원ㆍ정비 공사 이전 상태. 상석을 중심으로 박석이 깔린 묘역이 조성돼 있다. [연합뉴스]

구산동 지석묘는 2006년 택지지구 개발사업 도중 땅속에서 발견됐다. 상석의 동쪽 윗부분이 과거 배수로 공사 때문인지 L자 모양으로 깨져나간 상태였지만, 남아 있는 상석 무게만도 350t에 이르렀다. 상석을 중심으로 박석이 깔린 묘역 시설이 1615㎡에 달했다. 세계 최대 규모다. 이영식 인제대 명예교수는 발굴 현장을 처음 대면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거대한 상석도 놀라웠지만, 더 감탄스러웠던 건 남북 방향으로 현존 길이 85m, 너비 19m나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구획석렬(돌띠) 안에 돌들이 로마의 박석 길처럼 깔려 있던 모습”이라고 회고했다.

올 4월 상석 주변의 박석을 모두 들어낸 모습. [연합뉴스]

올 4월 상석 주변의 박석을 모두 들어낸 모습. [연합뉴스]

2년여 동안의 발굴작업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구산동 지석묘는 곧 다시 땅속에 묻혔다. 원형 보존을 위해 흙을 5m 높이로 덮은 것이다. 복원 기술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지만, 김해 안팎에선 “택지 개발 과정에서 문화재가 나오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란 말이 떠돌았다. 실제로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로와 공원 등이 정비된 뒤인 2012년에서야 김해시는 구산동 지석묘에 대한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도 문화재인 ‘경남도기념물 제280호’로 지정됐다.

유적을 현대식 공원처럼 정비

훼손 논란이 불거진 지난 11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 상석 북쪽 묘역 바닥이 현대식 공원처럼 매끈하게 정비돼있다. 이지영 기자

훼손 논란이 불거진 지난 11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 상석 북쪽 묘역 바닥이 현대식 공원처럼 매끈하게 정비돼있다. 이지영 기자

지하에 묻혀있던 구산동 지석묘는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가야사 복원을 국정 과제에 포함한 뒤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김해시는 이에 대한 국가 사적 승격을 추진하면서 2020년 보존용으로 덮었던 흙을 제거했다. 당초 계획으론 이달 말까지 정비 공사를 마무리 짓고 유적공원으로 개방할 예정이었다.

공사가 중단된 구산동 지석묘의 상석 북쪽 묘역 구역은 매끈하게 정비돼 있었다. 마치 현대식 공원의 바닥 같았다. 기존 박석에 붙여놓은 초록색 테이프가 없다면 어느 박석이 청동기 시대 유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워 보였다. 이는 인위적인 복원을 최대한 자제하는 문화재 복원 철학에도 위배된다. 유적에 새로운 건축 부재를 덧댈 땐 색상이나 질감을 다르게 하는 게 정석이다. ‘이건 가짜’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이탈리아 포로 로마노 유적 등도 그렇게 복원했다.

지난해 8~9월 김해시가 문화재 전문가들에게 받은 복원·정비 방안 자문에도 이런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경남도 문화재위원인 이영식 교수는 “박석 복원은 원형 보존의 원칙에 따라 신재(新材)를 채우지 않고 흙콘크리트 다짐으로 하는 게 적절하다”고 했다. 후대에 유실돼 박석이 없는 부분을 새 돌로 채우지 말고 그냥 흙 상태로 남겨두라는 것이다. 새 돌로 보충하기 위해 땅을 고르는 과정에서 유적의 원형이 손상될 수 있다는 게 이 교수 생각이었다. 돌을 사용한 복원엔 찬성한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들도 “훼손 결실된 부위에 원 박석과 동일한 암질의 돌을 사용하되 색상에 차이를 두라”고 자문했다. 하지만 실제 작업에선 어느 누구의 자문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철저히 전문가를 무시하며 진행된 복원 사업이었던 셈이다.

예산 빨리 쓰려다 사고 났나

제자리에서 빼낸 뒤 초록색 테이프를 붙여둔 청동기 시대 박석. 이 돌과 새 돌을 함께 사용해 바닥 정비 공사를 한 것이다. [연합뉴스]

제자리에서 빼낸 뒤 초록색 테이프를 붙여둔 청동기 시대 박석. 이 돌과 새 돌을 함께 사용해 바닥 정비 공사를 한 것이다. [연합뉴스]

유적의 발굴과 복원은 훼손의 위험도 안고 있는 과정이다. 1975년 경주 월지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 주령구는 보존 처리 차 건조기에 넣어 말리는 과정에서 타버리고 말았다. 건조기의 온도 자동 조절 장치가 고장 난 바람에 벌어진 참사였다.

이런 일종의 사고로 인한 손상보다 더 흔한 일은 인식 부족이 초래한 훼손이다. 단 하루 만에 졸속으로 발굴을 끝낸 무령왕릉(1971)이 그 대표적 사례다. 정치적 계산으로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김해 지역의 문화재 관계자는 “이번 경우도 가야사 관련 예산이 풍부할 때 도에서 예산을 받아 빨리 공원 조성까지 마치려다 벌어진 일”이라고 귀띔했다. 이번 사업엔 도비 10억원과 시비 6억7000만원이 투입됐다. 결과적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문화재를 훼손한 것이다.

구산동 지석묘는 기원전 2~1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로왕의 가락국 건국 시기로 알려진 서기 42년보다 100년 넘게 앞선다. 초기 가야 탄생의 비밀을 밝힐 단서가 될 가능성이 큰 유적이었다. 전문가들은 350t이 넘는 상석을 옮기기 위해 한 번에 3500명 정도의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봤다. 그런 대규모 인력 동원이 가능할 만큼 막강한 정치권력이 수로왕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저평가된 가야사, 일제의 역사왜곡

가야의 역사는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 역사학자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저서 『가야사 이해의 기초』에서 왜곡과 윤색으로 저평가 받고 있는 가야사의 문제를 짚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가 신라에 당연히 복속되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기술돼 있고, 일본의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선 줄곧 일왕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놓였던 듯 묘사돼 있다.

특히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지배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가 가야 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주장하며 가야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다. 20세기 초 일제는 고고학적 물증을 찾으려고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낙동강 유역권을 보물찾기 식으로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그런 빌미를 주지 않으려면 우리 스스로 가야의 역사를 탄탄하게 정리해놓아야 한다. 가야 관련 사료의 손실은 그래서 더 뼈아프다.

이번에 고압 세척으로 씻어내 버린 박석 아래 흙도 정보의 보고였을지 모른다. 유적지의 흙이 역사를 바꾼 사례는 여럿이다. 1976년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에서 찾은 탄화미는 벼농사가 일본을 통해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일거에 뒤엎는 증거가 됐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흔암리 탄화미의 연대는 기원전 10세기로 밝혀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탄화미보다 600년 이상 앞선 시기였다. 이로써 벼농사의 전파 경로가 중국→한국→일본으로 바로잡혔다. 발굴 현장의 흙을 물에 넣은 뒤 수면에 뜬 물질을 체로 걸러내고 돋보기·현미경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는 작업을 무려 6개월 동안 한 결과였다.

기생충알·꽃가루에 담긴 비밀

흙 속에 남아있는 기생충알이나 꽃가루 등도 중요한 정보가 된다. 21세기에도 신축 아파트 천장에서 인분이 발견되는 판에 청동기 시대 고인돌 묘역의 박석 아래에서 인분이 안 나오란 법이 없다. 만약 똥화석이라도 나왔다면, 이는 초기 가야인의 영양 상태와 식습관·질병·공중위생 등을 파악하는 귀한 자료가 됐을 터다.

문화재청은 17일 구산동 지석묘의 문화층 훼손 규모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매장문화재법 위반 혐의로 김해시장을 경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아무리 엄중히 처벌한다 해도 한번 파괴된 유물을 복구할 방법은 없다. 지난 2016년 그리스 테베 지역의 포세이돈 관련 유적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김승중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고고학에서 재현은 없다”며 “한번 훼손되면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해 고인돌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그 불가역성에 대한 자각이 우리 사회의 상식과 교양이 돼야 한다. 특히 최일선에서 문화재 관리 업무를 하는 각 지자체 공무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