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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차별 논란 총수제도, 필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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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손해용 기자 중앙일보 경제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손해용 경제정책팀장

공정거래위원회가 외국인도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려 했지만, 무산될 분위기다. 미국과의 통상마찰 우려로 다른 부처에서 반대 의견을 냈다. 총수로 지정되면 배우자와 친인척의 보유 주식 현황은 물론이고 이들이 계열회사와 맺은 거래 내역까지 공시해야 한다.

대기업집단 76곳 가운데 외국인이 지배하는 곳은 쿠팡·에쓰오일·한국GM 3곳. 사우디아라비아 국영기업 아람코가 최대주주인 에쓰오일이나 미국에 본사를 둔 GM은 누가 봐도 외국기업이다. 예컨대 에쓰오일의 경우 빈살만 왕세자를 총수로 지정해야 해 정치·외교적 문제가 생긴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래서 공정위가 머리를 썼다. 한국계 외국인과 외국 국적을 가진 재벌 2~3세,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만 총수로 지정하는 안을 마련했다. 그러면 대상은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뿐이다. 하지만 제도 개정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내년에도 김 의장은 총수 지정에서 제외될 전망이다. 같은 국내시장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토종’ 기업만 규제하는 ‘역차별’ 논란은 커지고 있다.

쿠팡이 미국 나스닥에 상장하긴 했지만,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국내 영업비중이 대부분이다. 국내 한국인 총수들은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누락하면 2년 이하 징역이나 1억5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는데, 김 의장은 이런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셈이다. 김 의장은 쿠팡의 지분 10.2%, 의결권 76.7%를 가지고 있다. 반면 네이버의 경우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지분은 4%뿐인데도, 그가 법적 책임을 짊어진다.

앞으로도 문제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의 장남은 일본 국적으로, 최근 롯데케미칼의 임원을 맡았다. 추후 경영 승계가 이뤄질 경우 ‘사각지대’로 남을 수 있다. 쿠팡처럼 한국이 아닌 뉴욕증시에 상장하려는 국내 기업도 줄을 서 있다. 기업집단 지정의 취지를 고려하면 김 의장을 총수로 지정하는 것이 옳다.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해진 글로벌 시장에서 고전하는 국내 기업인이 안방에서조차 ‘검은머리 외국인’에 차별받는 상황은 바로잡아야 한다.

부분적인 제도 개선이 힘들다면 차라리 근본적인 수술에 나서는 건 어떤가. 1987년 도입된 총수 지정 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 당시 한국식 총수 경영의 폐단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네이버·카카오처럼 스타트업으로 시작한 혁신기업이 한국 산업의 주축으로 떠오르고 있고, 대기업도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쿠팡이 불러온 논란은 35년 전 굴뚝산업 시절 만든 구(舊)제도가 현재 디지털산업 중심의 신산업에 과연 적합한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