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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 도와줘요" 노모 전화…반지하는 이미 물잠겨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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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11시 수마(水魔)가 일가족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빌라 반지층 창문 안에선 물이 팔뚝 굵기의 소방호스 4개를 통해 12시간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양수 작업을 하던 구급대원은 “안쪽이 23평인데 물을 빼내면 또 지하수가 차오르고 빼내면 또 지하수가 차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9일 오전, 전날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의 반지층에서 소방 당국이 호스 4개를 이용해 양수 작업을 하고 있다. 이수민 기자

9일 오전, 전날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의 반지층에서 소방 당국이 호스 4개를 이용해 양수 작업을 하고 있다. 이수민 기자

이 집엔 이모(72)씨가 40대 두 딸과 13세 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씨가 조직검사를 받기 위해 입원해 집을 비웠던 지난 8일 두 딸과 손녀가 참변을 당했다.

지난 10년간 이씨 가족과 왕래가 깊었다는 이웃 김모(64)씨는 8일 오후 8시 39분 “우리 애들 좀 도와달라, 집에 물이 찼다”는 이씨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저녁 식사 중이던 김씨의 딸과 사위가 급히 지하로 내려갔지만, 이미 물은 천장까지 차올라 문이 열리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침수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침수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반지층 이씨의 옆집에 사는 전모(52)씨는 “출근하던 중 창문으로 물이 들어왔다는 딸들의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 옆집을 구하려고 김씨의 사위와 함께 초록색 창문틀을 뜯으려고 했는데 안 됐다”며 “주차장이 넓고 지대가 낮은 빌라라 도로 전체의 물이 창문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18년 넘게 살면서 이렇게 잠길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9일 오전, 전날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의 반지층에서 소방 당국이 호스 4개를 이용해 양수 작업을 하고 있다. 이웃들이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창틀을 집어당기는 등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수민 기자.

9일 오전, 전날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빌라의 반지층에서 소방 당국이 호스 4개를 이용해 양수 작업을 하고 있다. 이웃들이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창틀을 집어당기는 등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수민 기자.

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건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둘째딸이었다. 발달 장애가 있는 첫째 딸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복지관에 다녔다고 한다. 김씨는 “남자라도 한 명 같이 살 수 있었으면 힘을 쓰든 뭘 하든 처음에 손을 쓸 수 있었지 않을까 싶은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딸은 차분하고 인사도 잘하는 똑똑한 아이였다”며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곳곳에서 인명피해 속출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9일 오전 11시 기준으로 잠정 집계된 인명 피해는 사망 8명, 실종 6명, 부상 9명이다. 이씨의 가족 외에도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서는 여성 1명이 물이 차오르는 집에 들어갔다 빠져나오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오후 6시 50분경에는 넘어진 나무를 정리하러 국립현충원 북측 서달산에 올랐던 동작구청 공원녹지과 직원이 감전돼 숨졌다.

 9일 오전 4시 30분께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서 경사면 유실로 인한 컨테이너 매몰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9일 오전 4시 30분께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서 경사면 유실로 인한 컨테이너 매몰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사망자 8명 중 4명은 경기도에서 나왔다. 9일 오전 4시 27분쯤 화성시 정남면의 한 야산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공장의 기숙사로 쓰던 2층 컨테이너 2동을 덮쳤다. 컨테이너는 머물던 2명 중 60대 남성은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지만 1층에 고립됐던 40대 중국인은 숨진 채 발견됐다. 양평군 강상면에선 이날 오전 1시 3분쯤 도랑을 건너던 60대 남성이 불어난 물에 휩쓸려 숨진 채 발견됐다. 8일 밤 11시 49분엔 광주시 목현동의 한 버스정류장이 무너지면서 30대 여성이 숨졌다.

반지층 상인·주민들 밤새 물 퍼내

일가족 참변 현장과 같은 반지층 주택과 상가들의 피해가 컸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주택 반지층에 거주하는 박서진(28)씨는 “어제 저녁에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었는데 별안간 화장실과 현관에서 물이 역류해 들어왔다”며 “2시간동안 물을 퍼냈는데 이번엔 흙탕물이 들어오기 시작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신림동 지하 1층에 있는 노래방 주인 조모(62)씨는 “밤 8시 30분쯤부터 가게 뒷문과 앞문 계단으로 물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래방 기계가 다 물에 잠겨버렸는데 혹시 감전될까 들어가볼 수도 없고 너무 막막하다”며 울상을 지었다. 같은 지역 다른 건물 지하에서 모자 공장을 운영하는 김재군(54)씨는 “실 한 타래 못 건졌다. 설비를 포함해서 안에 있는 게 전부 고물이 돼버렸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씨의 공장엔 아직도 천장까지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동작구 상도동 한 건물 지하1층에서 PC방을 운영하는 김기도(44)씨는 “100평 넘는 매장이 30분만에 천장까지 잠겼다. 할 수 있는 게 손님들과 직원들을 대피시키는 것뿐이었다”며 “손님들을 대피시킬 때 이미 무릎까지, 직원들이 빠져나갈 때는 머리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고 말했다.

9일 오전, 조씨가 운영하는 관악구 신림동의 한 노래방에 물이 가득차 있다. 조씨는 ″벽에 보이는 자국만큼 물이 차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서인 기자

9일 오전, 조씨가 운영하는 관악구 신림동의 한 노래방에 물이 가득차 있다. 조씨는 ″벽에 보이는 자국만큼 물이 차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서인 기자

산사태에 정전도…고립과 실종 이어져

이씨는 ″노천강당 뒤에 있는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한참 아래에 있는 인문대까지 떠내려왔다″고 말했다. 사진 에브리타임 캡처

이씨는 ″노천강당 뒤에 있는 버스정류장 표지판이 한참 아래에 있는 인문대까지 떠내려왔다″고 말했다. 사진 에브리타임 캡처

산사태와 정전으로 인한 피해도 컸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인문대학 대학원생 이모(28)씨는 “9시 40분 정도에 집에 가려고 밖에 나왔는데 산사태로 나무며 우산이며 길에 깔린 물건들이 떠내려오고 있었다”며 “논문을 쓰다 비가 그치면 귀가하려고 연구실에 올라왔는데 불이 확 나가버렸다. 바깥을 보니 가로등까지 꺼져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관계자는 “정전과 침수에 대한 피해가 복구 중이며 자세한 상황은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오전 0시 56분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성남 장호원 간 자동차전용도로 성남 방향 직동IC 부근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 토사가 지나던 차량을 덮치면서 운전자인 30대 남성이 숨지고, 함께 차에 타고 있던 2명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소방당국은 양평군 강상면에서 산사태로 고립된 노부부 등 8명을 구조하는 등 38건의 구조활동에 나서 71명을 구조했다.

9일 서울에 내린 80년 만의 기록적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한 서울 관악산역 인근 청룡산 자락에서 작업자들이 뿌리째 넘어진 나무를 정리하는 등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서울에 내린 80년 만의 기록적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한 서울 관악산역 인근 청룡산 자락에서 작업자들이 뿌리째 넘어진 나무를 정리하는 등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종사고도 이어졌다. 이날 0시 39분쯤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에서 70대 여성과 50대 남성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두 사람은 남매 사이로 집 주변 하천의 범람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던 누나가 귀가하지 않자 남동생이 찾으러 나섰다가 함께 실종된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인근 하천 등을 수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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