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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 하나로, 한 무리 죽일 수 있지" 큰 스님의 도발, 무슨 일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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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왜 여기를 쏘지 않는가!”

#풍경1

중국의 남쪽 광저우에 기반을 둔
혜능 대사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였습니다.
그의 그늘에서 숱한 선사(禪師)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중 하나가
남악 회양(南岳 懷讓, 677∼744) 선사였습니다.
남악의 제자 중 눈에 띄는 이가
마조 도일(馬祖 道一)이었습니다.
절집에서 마조는 육조 혜능의 손자에
해당했습니다.

탁월한 스승을 두었기 때문일까요.
마조 선사는 숱한 선문답 일화를
남겼습니다.

#풍경2

마조 선사가 토굴에서 좌선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석공(石鞏)’이란 사냥꾼이
토굴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혹시 이쪽으로 도망가던
   사슴을 못 봤습니까?”

사슴을 쫓아오다가
방금 놓쳐버린 모양이었습니다.
허둥대던 사냥꾼과 달리
마조 선사는 차분하게 입을 뗐습니다.

  “그대는 뭘 하는 사람인가?”

  “보시다시피 저는 사냥꾼입니다.”

마조 선사는 남악 회양의 제자였다. 중앙포토

마조 선사는 남악 회양의 제자였다. 중앙포토

얼른 사슴이 달아난 방향을 찾아야 하는데,
마조 선사는 자꾸 엉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냥꾼은 속이 탔겠지요.

  “사냥꾼이라,
   그럼 활을 잘 쏘겠구먼.”

  “네, 잘 쏘는 편입니다.”

마조 선사는 또 엉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럼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는가?”

이 물음에 사냥꾼이 대답했습니다.

  “화살 하나로 한 마리를 잡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조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럼 활을 쏠 줄 모른다고 해야지.”

마조의 말에 사냥꾼은 발끈했습니다.
주위에서 활 잘 쏘는
사냥꾼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마조 선사가 자신을 무시하니 말입니다.
화가 난 사냥꾼이 되물었습니다.

  “아니, 그럼 스님은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으십니까?”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지인 인도 쿠시나가르에 있는 탑. 벽돌 위에 순례객들이 올려 놓은 꽃이 보인다. 붓다의 깨달음은 중국 선불교로도 이어졌다. 중앙포토

석가모니 붓다의 열반지인 인도 쿠시나가르에 있는 탑. 벽돌 위에 순례객들이 올려 놓은 꽃이 보인다. 붓다의 깨달음은 중국 선불교로도 이어졌다. 중앙포토

마조가 답했습니다.

  “나는 화살 하나로
   한 무리를 잡는다네.”

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석공은
옳거니, 싶었습니다.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거든요.

  “아니, 출가한 스님이 어찌
   산 생명을 무리로 잡는단 말입니까?”

석공은 속으로 손뼉을 쳤습니다.
마조의 옆구리를 제대로 찔렀으니,
분명 진퇴양난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조는 조용히
석공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자네는 그런 것까지 알면서
   왜 이쪽을 쏘지 못하는가!”

그 말에 석공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국 석공은 활을 내려놓고 출가해
마조의 제자가 됐습니다.

#풍경3

궁금합니다.
석공은 왜 활을 내려놓았을까요.
마조의 말 한마디에
그는 왜 출가를 했을까요.

불교는 바깥에서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서 부처를 찾는다. 중앙포토

불교는 바깥에서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에서 부처를 찾는다. 중앙포토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석공처럼 살고 있습니다.

사냥꾼인 석공은
사슴을 쫓고,
멧돼지를 쫓고,
맹수를 쫓았을 겁니다.
사냥감을 잡으면
좋아서 쾌재를 부르고,
사냥감을 놓치면
분해서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쫓는 대상이 사슴이 아닐 뿐이지,
우리도 석공처럼 살아갑니다.
각자의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늘은 성공,
내일은 실패,
글피는 성공,
그다음 날은 또 실패…하면서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며 살아갑니다.

선문답 일화에
세세한 사연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석공도 필시 그랬을 겁니다.

바깥으로 활을 쏘며, 바깥의 사냥감을 쫓고 있는 우리는 문득문득 삶의 허전함을 절감한다. 중앙포토

바깥으로 활을 쏘며, 바깥의 사냥감을 쫓고 있는 우리는 문득문득 삶의 허전함을 절감한다. 중앙포토

인간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활을 잘 쏘고,
아무리 큰 짐승을 사냥해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허전함 말입니다.

마조 선사는
그곳을 겨누라고 말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석공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입니다.

사실 마조 선사는
석공의 가슴만 가리킨 게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가리키고,
또 그 가슴을
쿡, 쿡 찌르면서
직설적으로 묻는 겁니다.

너는 왜 바깥을 향해서만
활을 쏘느냐.
왜 네 안을 향해서는
활을 쏘지 않느냐.
진정 네가 맞춰야 할 과녁이
어디에 있겠느냐.

그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풍경4

마조는 왜 석공의 가슴을
가리켰을까요.
마조는 왜 우리의 가슴을 향해
활을 쏘라고 하는 걸까요.

자신의 가슴을 향해 활을 겨눌 때 비로소 마음공부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중앙포토

자신의 가슴을 향해 활을 겨눌 때 비로소 마음공부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중앙포토

맞습니다.
거기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禪) 불교에서만
자신을 겨누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오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어찌 보면
과격하고 급진적인
선언입니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너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으니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
활을 쏘는 일은
다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 짊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예수의 모습.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예수의 모습.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겁니다.

내 탓이오,
그건 내 안의 과녁에
탁, 탁! 하고 화살이 꽂히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화살이 박힐 때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우리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표현 방식과
사용하는 문법이 다를 뿐,
불교의 화살과
그리스도교의 화살은
같은 지점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게 어디냐고요?
다름 아닌
내 안에 숨어 있는 과녁입니다.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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