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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예법은 간략해야" 성균관의 차례상…그리고 예수의 안식일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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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

#풍경1

한국 사회에서 유교 문화를 이어온
성균관이 그저께 놀라운 발표를 했습니다.
다름 아닌 ‘추석 차례상 표준안’입니다.

성균관에서 내놓은 ‘추석 차례상 표준안’은
상차림부터 간소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예법에 따르면 큰 예법일수록 간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한국민속촌

성균관에서는 예법에 따르면 큰 예법일수록 간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한국민속촌

수저와 잔, 송편이 뒤쪽에
나물과 구이, 김치가 중간에
몇 가지 과일이 제일 앞에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깔끔하고 단출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추석 차례상을 차려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풍경2

그렇게 간결하게 차례상을 차려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니,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놓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일까요.

다들 그러지 않았을까요.
추석 상차림을 간결하게 하고 싶어도
행여 돌아가신 조상님께 결례가 될까봐,
후손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봐,
집안의 어르신들이 싫어하실까봐,
이런 눈치 저런 눈치 보며
망설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유교를 관장하는 성균관에서
심판을 자처하며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최영갑 위원장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예의 근본 정신을 다룬
   유학 경전 『예기(禮記)』의 ‘악기(樂記)’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합니다(大禮必簡).”

대례필간(大禮必簡).
이 네 글자를 보면서
저는 ‘정신’을 보았습니다.
예(禮)의 그릇은 형식이고 격식이지만,
그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은 정신이고 마음임을
대례필간의 네 글자는 설하고 있습니다.

성균관에서 발표한 추석 차례상 표준안. 사진 성균관

성균관에서 발표한 추석 차례상 표준안. 사진 성균관

더구나 큰 예법일수록
마음을 더욱 중시한다고 했습니다.
형식은 간결하고,
마음은 그득하게 말입니다.

#풍경3

사실 성균관이 이번에 내놓은
‘추석 차례상 표준안’은
늦어도 한참 늦은 감이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빚어진
명절의 후유증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성균관 측은 이런 고백도 덧붙였습니다.

  “명절만 되면 ‘명절 증후군’과
   ‘남녀 차별’이란 용어가 난무했다.
   심지어 명절 뒤끝에는
   ‘이혼율 증가’로 나타나는
   사회 현상을 모두 우리 유교 때문이라는
   죄를 뒤집어 써야 했다.
   유교의 중추 기관인 성균관은
   이러한 사회 현상이 잘못된 의례문화에
   기반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관행처럼 내려오던
   예법을 바꾸지 못했다.”

생각해 봅니다.
명절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걸까.
그렇습니다.
가족의 화목과
나의 뿌리에 대한 감사.
이 둘 아닐까요.

서울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에서 시민들이 추석 제수용품을 구입하고 있다. 중앙포토

서울 동작구 사당동 남성사계시장에서 시민들이 추석 제수용품을 구입하고 있다. 중앙포토

추석 명절을 계기로
오랜만에 가족이 만나고,
더 화목하고 행복해지는 게
추석의 취지에 맞겠지요.

그동안 우리의 현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추석을 계기로
가족간 갈등이 증폭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추석 상을 차리며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이
그런 갈등의 기폭제가 되곤 했습니다.

제사와 명절 차례 등은
모두 유교 문화입니다.
이제라도 성균관에서 해법을 내놓았다는
사실이 참 반갑습니다.

#풍경4

이번에 성균관에서 내놓은
추석 차례상의 가이드 라인은
여러 모로 놀랍습니다.

명절 때마다 쪼그리고 앉아서
전을 부치느라 고생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음식은
차례상에 꼭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사람들이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사람들이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또 있습니다.
차례상에 음식을 올릴 때,
‘홍동백서’‘조율이시’‘어동육서’ 등을
따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기준이
예법에는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퇴계 이황의 종갓집 제삿상을 보면
밥과 국, 전과 포, 과일 몇 개를 준비할 뿐,
상다리가 휘도록 차리지 않습니다.

원래 명절 차례상은 간결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돈을 주고
양반을 산 사람들이 부쩍 늘면서
자격지심에 차례상과 제사상을
거하게 차렸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종교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마음과 정신이 핵심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걸 지키기 위해
제도와 격식이 생겨납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
어느새 주객이 전도돼 있습니다.
마음과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형식과 제도가 주인이 돼 있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그곳을 향해
절을 하고 있습니다.

유교 문화인 제사와 차례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스라엘의 유대 문화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건
목숨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돼 있으니까요.
이 역시 처음에 안식일이 생겨난
이유는 망각해 버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격식만 남아버린 셈이었습니다.

이걸 뚫어본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추석 차례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추석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추석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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