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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무지갯빛 ‘우영우’는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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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자폐 스펙트럼을 다루며 우영우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일러스트=김지윤]

자폐 스펙트럼을 다루며 우영우 신드롬을 일으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일러스트=김지윤]

1953년 노벨문학상을 탄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언어의 달인이다. 최근 그의  명언과 잇따라 마주쳤다.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와 『뉴로 트라이브(NeuroTribes)』에서다. 두 책에서 인용한 처칠의 말은 ‘자연이 긋는 선은 항상 주변으로 번진다’였다.
 원문이 궁금해 구글을 검색했다. ‘Nature never draws a line without smudging it’이다. 흔적·얼룩이 번진다는 뜻의 ‘스머지(smudge)’가 핵심이다. 이 앞의 문장도 함께 읽어야 맥락이 잡힌다. ‘세상은, 자연은, 인간은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가장자리는 칼로 자른 듯 날카롭지 않고, 항상 해어져 있다.’ 부대끼며 사는 게 순리라는 권고이리라.
 뜬금없이 처칠을 꺼낸 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이다. 한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 ‘포토 메모리’를 지닌 우영우와 그를 응원하는 주변 인물들이 경제난과 역병에 꺼져가는 시청자들 마음에 다시 사랑의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다. 자기소개에서 “특이사항 자폐 스펙트럼”을 당당히 밝히는 우영우는 예전에 보지 못한 별똥별 같은 캐릭터다.

자폐 스펙트럼 드라마가 남긴 것
판타지극과 실제 현실 크게 달라
문화도 정치도 서로 섞이며 성장

 요즘 상찬이 쏟아지는 ‘우영우’에서 ‘스펙트럼’이란 단어가 확 들어왔다. 자폐와 스펙트럼이 한 단어처럼 통용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소셜미디어에 오른 감상평에도 비슷한 반응이 많다. 자폐증은 너무나 다양하고, 몇 가지 유형으로 제한할 수 없기에 스펙트럼을 붙여야 한다고 한다.
 자폐 스펙트럼은 수많은 자폐아 부모의 고통과 헌신 끝에 생겨났다. 학문적 공인을 받은 것도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영국 정신의학자 로나 윙이 1970년대 후반 착안했고, 80년대 후반에야 인정받기 시작했다. 역시 자폐아 딸을 둔 윙이 수많은 자폐증 어린이의 면담 카드를 일일이 검토하고, 또 부모·교사들과 직접 만나며 종전의 자폐 기준이 무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존 잣대를 벗어난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윙은 처칠의 말에서 영감을 얻어 스펙트럼을 제안했다.
 자폐증은 독일 출신의 레오 카노가 처음 정립했다. 당대 최고의 정신과 의사 카노는 1940년대부터 ‘정서적 접촉에 대한 장애’를 하나의 독립된 증후군으로 명명했다. 그전에는 백치·정신박약아·광인 등으로 낙인찍힌 ‘불량인간’들이었다. 윙의 스펙트럼은 카노의 증후군을 확장한 개념이다.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자연의 빛깔을 함의한다.
 드라마 ‘우영우’ 뒤에는 이런 시대적 진화가 깔려 있다. 다만 우영우는 극히 판타지적인 캐릭터다. 자폐 스펙트럼에서 가장 두뇌가 뛰어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가장 따뜻한 이웃을 둔 경우다. 드라마와 현실은 판이하기 때문이다. 소통 불능의 자녀들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부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집 안에 갇힌 아이·성인들이 지금도 대다수다. 한국에서 더는 버틸 수 없어 이민 가는 이도 많다. 우영우에 가려진, 거인 청년 ‘김정훈’(펭수를 좋아하는 드라마 3회 등장인물)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이유다.
 자폐증이 가장 빈번하게 비유되는 분야는 정치다. ‘자폐증에 갇힌 여의도’ ‘자폐적 증상의 ○○당’ 식이다. 원인 제공자는 둘째 치고 그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폭력적인 표현인지를 ‘우영우’를 보면서 반성한다. 자폐는 없고 자폐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선천적 조건을 포괄하는 ‘신경다양성’도 사용되고 있다.
 진화와 혼돈은 함께 온다. 앞의 두 책을 번역한 강병철(소아과 전문의)은 “선천적 요인을 들어 자폐 치료를 거부하는 것마저 다양성으로 인정해야 할지 논란이지만, 폭력과 저주로 얼룩진 자폐의 역사가 차이와 이해라는 ‘인간적인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우영우’의 선구자는 영화 ‘레인맨'(1988)이다. 그 후예는 어떤 모습일까. 복잡한 일상과 보다 다양하게 섞이지 않을까. 세상은 그렇게 ‘번지며’ 커간다. 정치의 열쇠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