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이 변하지 않고는 정책마비병 못 고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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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의 정책이 갈수록 꼬이고 있다. 내놓는 정책마다 실패의 연속이다. 어떤 외국의 평가자는 한국이 '정책 마비'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정책을 내놔도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더 크거나, 새로운 문제를 낳는다.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 등 그동안 부동산 정책의 실패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이 사의를 표명한 지 하루 만에 또 부동산 대책을 내놨다. 이 정부 들어 굵직한 대책만 벌써 여덟 번째다. 아파트 공급 확대에다 수요억제책을 더한 뒤 국세청의 투기조사를 합친 대책이다.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끌어 모아 내놨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대책도 이전 정책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앞선다. 시장의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 역시 약발이 듣지 않거나, 자칫하면 새로운 부작용만 낳을 우려가 크다고 말한다.

우선 졸속으로 만들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정책 실패의 책임자들이 물러나겠다고 한 다음 날 새로운 대책이란 걸 내놓을 수 있는가. 정책 입안자들이 바뀐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생각이 달라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위 책임자들이 물러났다고 하지만 기존 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성도 없고,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숙고도 없다. 오히려 그동안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돼온 재건축 규제나 과도한 세금 폭탄, 엉뚱한 신도시 건설 계획 등의 정책기조는 고수하겠다고 강변한다. 이러니 새로울 수도, 달라질 것도 없는 대책들을 주워 모아 범벅을 만든 데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날 말 많고 탈 많았던 출자총액제한제도 개편안을 내놨다. 공정위가 출총제의 보완책이라며 그토록 목 매달고 추진해온 순환출자에 대한 새로운 규제는 없던 일로 하고, 출총제의 적용 대상만을 일부 줄인 내용이다. 그러나 말이 출총제 규제 대상을 줄였다는 것이지 실제로 투자를 할 만한 이른바 중핵기업들은 그대로 묶어놨다. 규제완화나 투자촉진의 효과는 거의 없고, 그저 바꿨다는 생색만 낸 셈이다. 몇 달에 걸쳐 소모적인 논란을 벌인 끝에 결국 아무런 효과도 없는 제도 개편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러러면 그동안 무엇을 위해 거창한 작업반을 만들고, 기업들을 애태우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왜 정부 정책이 늘 이 모양인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타가는 사람들이 나라에 무익하거나 국민에게 손실을 입히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그 근본 원인은 이 나라의 공무원들이 국민과 나라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위한 정책을 펴는 데 있다. 멀쩡하던 사람도 일단 정부에 들어가기만 하면 소신을 버리고 코드 맞추기에 급급하다. 관료들은 정책이 잘못됐는데도 아무 말을 못하고, 대통령과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는 데 바쁘다. 이래서는 책임자 몇 명을 갈아봐야 실패한 정책을 바로잡기 어렵다. 그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땜질식 보완책이나 누더기 규제책만 양산할 뿐이다.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대통령을 둘러싼 386 보좌진의 이념적 편향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런 식의 정책의 왜곡과 실패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로운 부동산 대책을 서둘러 내놓을 게 아니라 정책팀을 전문가로 다시 구성하고, 이들에게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도록 맡겨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다시 한번 당부하거니와 남은 임기 동안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는 청와대에 포진한 비전문가들의 이념적 편향이나 코드 집착에서 정부정책을 분리시켜야 한다. 실패의 끝까지 가볼 생각이 아니라면 이 성역부터 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