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한·일 ‘가능한 차선’이 최선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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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일본 총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백악관 등 미국 정부 건물과 군부대에 일제히 조기가 내걸렸다. 유사한 전례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 손가락을 꼽는다고 한다. 찰떡 동맹 미국뿐이 아니다. 서유럽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오랜 영토 분쟁에다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제재로 불편한 관계인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아베의 모친에게 친서를 보냈다. 국제사회에서 아베의 위상을 실감케 하는 사례들이다.

아베의 돌연한 죽음을 접하는 한국인의 흉중은 다른 나라 국민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의 역사 인식은 불행한 과거사의 유산을 껴안고 살아온 한국 국민으로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인식 속에는 아베야말로 한·일 관계를 역대 최악으로 몰고간 원인 제공자로 남아 있다. 2019년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조치를 기화로 일어난 일본상품 불매운동의 구호가 ‘노(No) 아베’였던 이유다.

아베 숨졌다고 바로 관계 호전 안 돼
강제징용 해법, 조금씩 양보 필요
불가능한 최선 매달려선 진전 없어

2년 전 아베가 스스로 총리직을 내려놓았을 때 일본의 경제주간지는 “아베 사임을 가장 반기는 건 한국”이라고 썼다. 불매운동에 나선 한국 대중에겐 아베만 사라지면 한·일 관계가 개선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베의 뒤를 이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현 총리도 한국에 대한 입장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한국이 먼저 제시해 오면 그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아베가 불귀의 객이 된 지금도 그런 기대가 있는 듯하다. 기시다 총리가 아베 ‘상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태도를 달리할 것이란 기대다. 아베가 속한 세이와카이(淸和會) 파벌과 기시다가 속한 고치카이(宏池會) 파벌의 정책 성향을 비교하는 그럴듯한 분석까지 곁들여진다. 이런 기대는 보수 본류와 방계가 역전된 자민당 파벌 간 역학관계의 변화, 파벌 간 정책 차별성의 희석에 따른 ‘총(總)보수’ 수렴 현상, 특히 한·일 관계 현안에 대한 일치된 목소리 등을 모두 무시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낙관론 내지 희망사고(wishful thinking)일 뿐이다.

한국인의 기준으로 볼 때 합리적이고 겸허한 과거사 인식의 소유자나 한국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일본 정치인을 찾기 힘들고 설령 있다 해도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이다. 정계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과거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는 전후(戰後) 세대가 주축으로 등장한 세대교체와 함께 일본 사회 전반의 보수화가 진행됐다.

아베가 선두에서 보수·우경화를 이끌었지만 노련한 정치인 아베가 일본 사회의 변화에 편승한 측면도 있다. 일본 정계의 주류는 아베의 계승자들이고, 도쿄 거리에서 마주치는 시민들 중에는 아베 지지자가 반대자보다 더 많다. 아베는 갔어도 한국인들이 외치던 ‘노(No) 아베’는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한·일 관계로만 범위를 좁혀볼 때 아베의 사망보다도 훨씬 큰 변수는 한국의 정권교체다. 반일 정책을 폈던 문재인 정부 때와 달리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는 일본도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북한 위협과 미·중 경쟁 등 지역 정세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좁혀졌다.

남은 관건은 강제징용 해법이다. 이는 두 나라가 서로 조금씩 물러서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 국내에서 맞을 역풍의 강도를 생각하면 일방적 양보로 인한 해결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에서 제시된 몇몇 해법은 피해자들에게 지급할 배상금 재원을 한국 측이 충당하는 방안이다. 그 경우 일본 측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사죄든, 입장 표명이든, 기부금 출연이든 일본의 참여가 있어야 한국의 피해자나 협상 반대론자들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듭 반복하지만 양국 지도자들은 ‘불가능한 최선’ 대신 ‘가능한 차선’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리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 순간 차선은 양측 모두에게 최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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