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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김여사,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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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여사(女史)는 3000년 전 중국 고대국가인 주나라(기원전 1100~기원전 256) 때부터 쓰였다. 당시 왕실에 여사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후궁을 섬기며 기록·문서를 맡았던 여관(女官)이었다.

점차 역할이 커져 황제와 동침할 후궁의 순서를 정해주는 일까지 맡게 됐다. 궁궐 내 대단한 권력이었다. 이후 고위 관료의 부인 호칭으로 사용됐는데 공식적 권력(남편) 뒤 실질적 권력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여사는 청나라(1616~1912) 말기 술집 포주나 창녀를 부르는 말로 확 바뀌었다. 그러자 근대 들어 지각 있는 여성들이 의미를 바꾸려고 여사(女史)를 여사(女士)라고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조선왕조실록』에 여사라는 말이 등장한다. 대개 왕족이나 사대부 집안 여성 중 절개·효도·내조 등 모범적인 행실을 보인 여성을 칭찬하는 말로 쓰였다.

한국에서 여사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1750년대 영국에서 문학이나 학문에 관심이 많은 여성을 ‘블루스타킹’(Bluestocking)이라고 칭했는데, 일본에선 이 단어를 여사로 번역해 사용했다. 당시 일본에선 결혼한 여성의 성 뒤에 여사를 붙여 존칭으로 사용했고 한국도 영향을 받았다.

현재는 다른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호칭이 마땅치 않은 나이 많은 여성을 ‘아줌마’ 대신 부를 때 사용한다. 민폐 운전을 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김여사’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에 여사를 붙였다.

최근 대통령 부인의 지칭이 도마 위에 올랐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로 칭해야 할지, 김건희 씨로 불러야 할지 갑론을박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1963~1979) 언론은 박 대통령을 박정희씨라고 칭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1988~1993) 때도 노태우씨라고 썼다. 당시 씨는 존칭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1990년대 말 들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라고 쓴 언론은 비난받았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씨,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씨도 질책 대상이었다. 예의에 어긋나고 무시한다는 이유였다. 씨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여사·씨·영부인·국모…. 사회적 합의만 있다면 대통령 부인을 칭할 말은 많다. 그런데 아쉽다. 지금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칭이 아니라 공식적 권력 뒤 실질적 권력의 행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