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삶에도 나침판이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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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

숲길을 걷는다. 파란 하늘빛 산 수국이 곳곳에 피었다. 한라산 생태 숲길은 진녹색 빛깔이다. 제주는 유월 초부터 장마권에 든다는 것을 나무들이 더 빨리 아는 것 같다. 간간이 비추는 햇살을 만끽하며 숲길을 걷는다. 얼마 전부터 하루 두 시간 좌선하는 시간을 걷는 시간으로 바꾸었다. 내 몸에 침습한 병마의 기운을 털어내려 좌복에 앉는 시간을 줄인 것인데,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지난겨울을 태백산 구마동 골짜기에 자리한 토굴(작은 수행처)에서 보내고 봄이 되어 산을 내려왔다. 그동안 갚지 못한 밥값을 할 요량으로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니다가 덜컥 병이 났다. 39~40도를 오가는 고열에 온몸이 뒤틀렸지만, 화두를 놓치지 않으니 그대로 평온했다. 그러다가 문득 남겨진 숙제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서, 몸부터 추스르려 큰 병원을 찾았다. 호되게 앓고 나니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는, 지금은 열반에 든 스승 고우 선사가 떠오른다.

15년 전 만난 고우 스님의 감동
여든까지 손수 운전하며 법문
수행과 일상의 일치 본받고파

15년 전 초여름, 태백산 금봉암에 주석하던 칠십 노구의 선승 고우 스님을 뵈었다. 점심 이후부터 시작된 대담이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폐결핵으로 절망의 끝자락에서 시작한 출가 이야기부터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안목이 열리는 두 번의 귀한 수행담을 들었다.

“1970년대 초 상주 심원사에서 정진할 때였어요. 새벽이면 일어나서 정진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참선을 하다 불현듯 ‘무시이래(無始以來)’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무시이래가 비롯함이 없는 아득한 옛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이구나!’ 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체험을 했어요. 또 한 번은 1981년 각화사 동암에서의 경험입니다. 『육조단경』 ‘정혜불이품(定慧不二品)’의 ‘선정과 지혜가 하나가 되더라도 비도(非道)이다. 하나가 되어 통류(通流)해야 한다’는 구절을 보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 대목을 보다가 이해도 아니고 체험도 아닌 어떤 강렬한 느낌이 왔어요. ‘통하여 흐른다’는 단어를 보는 순간, 그동안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뜻이 이해되었습니다.”

스님은 이를 ‘안목이 열렸다’고 표현하였다. 그 이후 눈에 비치는 두두물물이 다 부처라는 것을 알았고, 모든 존재 원리가 이해되었다고 밝혔다.

선사의 말씀에 마음으로 크게 공감하였다. 선정과 지혜는 한 몸이며, 통하여 흐를 때 언행일치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 그 순간 ‘지금 맡고 있는 주지 소임을 마치게 되면 모시고 한 3년은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진한다면 오래지 않아 공부의 끝자락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개안(開眼)의 경지를 이룬 선지식이면서도 고우 스님은 늘 “나는 깨달은 사람은 아직 아닙니다. 깨달음은 언행일치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1937년에 태어나 85세에 열반에 들었다. 25살에 출가하여 60살까지는 선원에서 오로지 참선수행과 참선지도에만 전념하였다. 60살부터 10년 동안은 간화선 수행전통을 세우는 데 진력하였다. 70살부터는 법문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다녔다. 남에게 신세 지지 않겠다며 운전면허를 취득해 손수 운전하며 법문을 다녔다. 80살이 되어 기력이 쇠하자 일절 대중을 만나지 않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3년 가까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23년 전에도 IMF 외환위기로 지금처럼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고우 스님의 재미난 일화가 있다. 봄 어느 날, 마을에서 식당을 하는 신도가 어두운 표정으로 절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물으니, 식당에 손님이 없어 식당문을 닫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고우 스님은 “식당에 손님이 오면 돈으로 보지 말고, 은인으로 대하라. 손님 한 사람 한 사람 덕분에 그동안 아이들도 키우고 좋은 집에서 자가용 굴리고 살지 않나?”라고 일러주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 식당을 운영하자, 불황에도 직원을 열두 명이나 둔 잘나가는 식당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삶은 한 번뿐이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고, 완성된 삶을 살고 싶다. 완전한 삶을 산 분을 성인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성인의 삶과 가르침에서 지혜를 얻고, 나침판 삼아 살아가기를 원한다. 성인의 삶과 가르침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라는 것, 한마디로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을 권하는 가르침이다.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자비를 상징한다. 우리 서로가 문수·보현이 되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