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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의사와 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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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사람은 언제부터 자신의 노화를 알까요. 저는 지병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제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0년 전의 일입니다. 개인종합병원의 행정원장으로 있는 대학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에 좋은 기재가 들어왔으니 한번 와서 건강검진을 받아보라는 얘기였지요.

환자는 의사에게 철저히 의존
한밤중에 운전해 응급실 찾아
환자 입장에 서는 의사가 명의

그 병원에서 전신 패트 시티 촬영을 해보고 제가 심장상행대동맥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대동맥이 많이 부풀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병원의 협진 요청으로 간 대학병원에서 제가 선천성 판막 기형이라는 것과 그것이 병의 원인임도 알았습니다. 불시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몇 개 병원으로부터 소견을 들었습니다.

협진 병원에서는 조심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다음 대학병원에서는 판막과 대동맥을 모두 교체하자는 소견이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찾아본 병원에서는 판막은 기형이나 기능이 정상이니 그대로 두고, 대동맥을 인조 혈관으로 교체하자는 소견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은 병원에서는 저의 경우를 놓고 심장내과와 흉부외과의 합동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결과, 판막은 기능이 정상이니 그대로 두고 문제가 된 혈관은 터지지 않도록 싸주면 된다는 의견이 제시됐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곧바로 제게 전화가 왔고, 저는 제 몸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적은 그 방법으로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고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예정돼 있던 해외 출장을 취소하고, 수술 날까지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입원을 하자, ‘기다려보자는 데도 있었는데 괜한 짓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물밀 듯이 일었습니다. 수술 날 아침, 나의 방에 들른 집도의가 “아무 염려 마시라”고 저를 위로했고 의사의 그 말 한마디가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저는 평안한 마음으로 수술대 위에 누울 수 있었습니다. 수술이 끝난 뒤에도 각종 튜브에 휘감겨 괴로워하는 저를 보고는 “빨리 제거해 편하게 해드리라”고 의료진에게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5년, 제게 또 다른 지병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한국전립선-배뇨관리협회에서 원로 언론인들을 상대로 전립선 검사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그 검사에서 저는 전립선이 비대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는 의사가 있는 병원 비뇨기과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고, 약물로 치료해보자는 소견에 따라 매달 약을 타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불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전남 해남에 다녀오는데 절박뇨가 쳐들어온 것입니다. 가까스로 견디며 버스가 두세 차례 서는 휴게소에서 조금씩 안정을 취하면서 상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면 곧바로 요의(尿意)가 엄습하니 그야말로 초인적인 인내를 해야 했습니다. 해남을 다녀온 열흘 뒤, 강원도 오대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1주일 뒤, 이번에는 아예 소변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간신히 견디며 이틀 동안 약속된 일정을 소화하자 밤중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토요일 새벽 두 시 반에 승용차를 몰고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소변을 뽑아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도 요 폐색이 계속돼 저는 주치의의 안내로 다니던 병원 응급실에 가서 도뇨관을 삽입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지낸 엿새 동안 공식적으로 약속된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을 삼갔지요. 마침내 조심스레 관을 뽑아보니 소변이 다시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 저는 의사와 수시로 통화해서 상태를 알리고 처방을 상의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 심야와 새벽에도 염치없이 해댄 전화가 미안해서 만났을 때 사과했더니 “무슨 소리요. 의사 뒀다 어디 쓸려고···” 하며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 선생 나이에 수술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며 약의 종류를 다소 바꾸어 처방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배뇨 기능이 정상화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를 안심시킵니다. 성서 이야기에서도 누가가 나타나는 장면은 늘 안심이 되고 편안하게 묘사됩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고대인에게 질병은 얼마나 무서웠으며 의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을까요. 로마 병사들도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의사 누가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결과를 간절히 기대하지만, 이 병의 향방도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요. 의사와 환자는 철저한 의존 관계가 됩니다. 병원뿐 아니라 어디서나 환자가 편하게 전화할 수 있게 해주고, 진심으로 걱정하며 맞춤형 치료법을 찾으려 고심하는 의사의 모습은 우리 시대 명의의 얼굴이라고 하겠습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