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아이

국적 접겠다는 찬 WHO 총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제 국적은 잠시 접어 두고 인류 건강을 위해 소임을 다하겠다."

지난 주말 홍콩의 마거릿 찬(陳馮富珍) 박사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당선이 확정된 직후 언론과 193개 회원국 대표들에게 한 말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임을 다하면 되지, 국적까지 접을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찬 박사가 국적을 거론한 데에는 사연이 있다. 5개월 전 한국 출신인 이종욱 사무총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모두 12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중 한 명이 찬 박사다. 올해 59세. 홍콩에서 태어나 25년 동안 위생 분야에서 일한 공중위생 전문가다. 2003년 홍콩 위생서장 시절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박멸을 진두지휘했다.

이력으로 보면 WHO 수장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출마 당시엔 당선 가능성이 작았다. 일본의 오미 시게루(尾身茂) WHO 서태평양 사무처장이나 멕시코의 훌리오 프렝크 보건장관 등 중량급 인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국의 우이(吳儀) 부총리는 8월 외교부에 찬을 당선시킬 전략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외교부에 대책반이 발족했고, 이날부터 찬의 일정은 외교부가 짰다. 그가 홍콩 대표를 넘어 중국의 자존심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결선 투표가 있던 지난주까지 그는 선거권이 있는 34개 이사국 중 30개국을 돌며 표밭을 다졌다. 특히 중국이 지난 30년간 공을 들여 온 아프리카와 동남아 이사국을 주요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당선이 확정되자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지는 '쿠데타'라는 제목을 달았다.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중국의 힘에 대한 경외의 표시였다.

WHO 58년 역사에 첫 중국인 사무총장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제네바까지 날아간 가오창(高强) 중국 위생부장은 "중국의 국제 위상이 높아질 계기"라고 덕담을 건넸다. 주 스위스 중국대사 사쭈캉(沙祖康)은 "아프리카가 없었다면 찬의 당선은 불가능했다. 중국 외교의 승리"라고 말했다.

당선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 외신기자가 중국 보건행정의 불투명성을 꼬집었다. 각종 질병 자료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아 국제적인 대책 마련을 어렵게 하는 중국에 앞으로 찬 박사가 바른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찬 박사는 "중국이라 해서 실체적 자료를 덮도록 하지 않겠다"고 답했지만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은 찬의 당선 다음 날인 10일 갑자기 2004~2005년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 샘플 20여 개를 미국에 있는 WHO 종합연구소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2년 전 AI가 중국과 동남아를 휩쓸 당시 WHO가 예방대책 마련을 위해 샘플 제공을 호소해도 들은 척도 않던 중국이었다. 당선 선물인 셈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자료 공개는 여기까지다. AI의 발원지로 통하는 중국 칭하이(靑海) 지역 철새들이 남방으로 이동을 시작하자 WHO 베이징 본부가 중국 농업부에 올해 채취한 바이러스 샘플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있다. 바이러스 샘플은 새로운 변종을 확인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미국 국립과학원도 최근 중국에 변종 AI가 발생했다며 베이징에 자료 공개를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 농업부는 "그런 일이 없다"는 말로 일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WHO는 이번 겨울을 걱정한다. 동남아는 벌써 AI 비상이다.

WHO 수장이 된 찬 여사에게 AI 대책은 주요 현안이다. 그렇다면 내년 1월 취임 전에 "국적을 잠시 접고 인류 건강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중국 정부로부터 자료를 얻어 내면 올 겨울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중국의 도움으로 당선돼 객관적인 업무 추진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국제적 우려를 불식할 수도 있다.

최형규 홍콩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