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베꼈다...'해킹'해서 더 잘나가는 당돌한 명품

중앙일보

입력 2022.05.20 05:00

업데이트 2022.05.20 09:09

종횡으로 브랜드가 뭉치고 흩어지는 ‘대 협업’의 시대다. 계속해서 이슈를 만들어 관심을 끌어야만 하는 디지털 시대, 브랜드의 생존법이다. 하지만 두 브랜드가 만나 예기치 못한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신선해 보였던 것도 옛말. 하루가 멀다고 협업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의 협업에 눈길이 간다.

멋지게 섞였다, 펜디+베르사체

지난 12일 이탈리아 브랜드 펜디와 베르사체가 만나 ‘펜다체(Fendace)’ 컬렉션이 출시됐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두 브랜드의 만남은 지난해 가을 열린 밀라노 컬렉션에서 최초 공개된 후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번 협업에 대해 펜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킴 존스는 “협업이라기보다 교환(Swap)에 가까우며 무엇보다 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펜디와 베르사체가 만나 탄생한 '펜다체.' [사진 펜디]

펜디와 베르사체가 만나 탄생한 '펜다체.' [사진 펜디]

펜다체 컬렉션은 펜디의 디자이너 킴 존스와 베르사체의 디자이너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서로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각각 25벌을 제작, 총 50벌의 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펜디를 상징하는 이중 에프(FF)로고와 베르사체를 상징하는 메두사와 바로크 스타일의 문양이 주요 디자인 요소로 사용됐다.

펜디의 로고와 베르사체 특유의 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베르사체의 상징인 '옷핀' 드레스를 펜디가 재해석한 룩(오른쪽). [사진 펜디]

펜디의 로고와 베르사체 특유의 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베르사체의 상징인 '옷핀' 드레스를 펜디가 재해석한 룩(오른쪽). [사진 펜디]

이 둘은 서로의 만남을 협업이 아니라 ‘스와프’라고 칭했다. 동종 업계 두 경쟁 브랜드의 만남은 기존 협업 구도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 브랜드가 중심을 잡고 다른 브랜드의 로고나 상징적 디자인 요소가 장식처럼 얹어지는 형식이 아니라, 동등한 두 브랜드가 조화롭게 섞여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펜디는 프랑스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 소속이고, 베르사체는 다국적 패션 기업 카프리 홀딩스 소속이다. 디자이너들 사이의 유대감 외에는 어떤 접점도 없는 대형 브랜드의 만남은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협의 없이 서로 ‘해킹’하기

그런가 하면 두 브랜드의 만남이 협력이 아닌 해킹으로 불린 사례도 있다. 지난해 4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구찌는 같은 케어링 그룹 산하의 발렌시아가와 함께 색다른 컬렉션을 선보였다.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미켈레와 발렌시아가의 뎀나바잘리아는 협업에 대해 어떤 협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로를 해킹하는 데 동의만 한 채 4월에 구찌가 발렌시아가를 해킹한 ‘구찌시아가’가, 6월에는 발렌시아가가 구찌를 해킹한 ‘발렌시구찌’가 공개됐다.

발렌시아가의 아워글래스(모래시계) 가방에 구찌 로고가 들어가있다. [사진 구찌]

발렌시아가의 아워글래스(모래시계) 가방에 구찌 로고가 들어가있다. [사진 구찌]

발렌시아가의 레깅스 부츠에 구찌 로고가 들어갔고, 구찌와 발렌시아가의 로고가 교묘하게 합쳐진 가방이 등장했다. 언뜻 보면 두 브랜드를 조악하게 섞은 모조품 같아 보이기도 한다. 곳곳에 이런 재치를 숨겨 놓은 디자이너들은 이번 해커 프로젝트를 통해 진품과 위조품, 사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를 더 이상 구분하지 않는 현시대를 보여준다. 어디까지가 모방이고, 또 어디까지가 오마주(인용)인지 점점 모호해지는 경계를 표현했다.

구찌와 발렌시아가가 서로를 해킹해 만든 협업 제품. [사진 발렌시아가]

구찌와 발렌시아가가 서로를 해킹해 만든 협업 제품. [사진 발렌시아가]

영혼 없는 협업은 그만, 진짜 ‘X’가 필요해

흔히 협업을 표시할 때 브랜드와 브랜드 사이 곱하기(X) 기호를 넣는다. 두 브랜드가 만나 섞였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엔 협업이 남발되다 보니 그냥 두 브랜드 로고를 더하는 수준에서 머무는 경우도 많다. 2004년 스웨덴 패션 브랜드 H&M과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협업 컬렉션이 발표된 이후 협업은 패션 업계의 단골 마케팅 소재가 되었다. 유니클로는 질 샌더·르 메르 등의 쟁쟁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매장 앞 긴 줄을 세우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성비 있는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와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의 만남도 더는 화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는 협업 그 자체로는 경쟁력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스톤아일랜드와 슈프림의 협업 컬렉션이 지난주 발매됐다. [사진 스톤아일랜드]

스톤아일랜드와 슈프림의 협업 컬렉션이 지난주 발매됐다. [사진 스톤아일랜드]

지난주 이탈리아 스톤아일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의 7번째 협업 제품 발매를 앞두고 주요 매장 앞에서 4박 5일간의 ‘노숙런(노숙해서 매장에 들어간다는 뜻)’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최근 ‘되는’ 패션 협업의 양상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탄탄한 팬덤과 고유의 세계관을 가진 강한 두 브랜드의 만남이자 지난 2014년부터 꾸준히 이어온 협업으로 소비자들 사이에서 진정성을 획득한 협업이라는 점에서다.

두 브랜드는 2014 년부터 주기적으로 협업을 이어 왔으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슈스톤'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사진 스톤아일랜드]

두 브랜드는 2014 년부터 주기적으로 협업을 이어 왔으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슈스톤'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사진 스톤아일랜드]

미국 패션지 보그는 “한때 브랜드 파트너십의 보편적 상징이었던 ‘X(협업)’는 패션계 전반에 걸쳐 인기를 잃은 것 같다”며 “협업은 영혼 없는 브랜드 연결에서 동등한 결혼으로 변형되었다”고 보도했다. 한 명품 업계 관계자는 “패션과 식음 브랜드의 만남처럼 아예 관계없는 두 브랜드의 색다른 협업이 주목받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소비자들도 일시적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협업에는 반응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며 “오히려 디자이너들과 꾸준히 협업 컬렉션을 내는 몽클레르나 슈스톤(슈프림+스톤아일랜드)처럼 다년간에 걸쳐 지속적이고 창의적으로 이어지는 협업에 점수를 더 주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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