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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원 가방? 당근에 팔아"…요즘 명품은 '구찌적인 삶' 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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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루이비통 피에르 상 티 코스 양도 원해요”

지난달 26일 예약을 시작한 루이비통 팝업 레스토랑 ‘피에르 상 at 루이비통’의 전 좌석이 5분 만에 마감된 뒤 온라인 중고 장터에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글이다. 4일부터 6월 10일까지 약 5주간 운영되는 레스토랑으로, 점심 코스와 애프터눈 티 코스, 저녁 코스 하루 100여 석, 약 3000여 석이 순삭(순간 삭제) 됐다. 점심 코스는 1인당 13만원, 저녁 코스는 23만원, 티 세트는 8만원이다.

4일부터 약 5주간 운영을 시작한 '피에르 상 at 루이비통' 전경. [사진 루이비통]

4일부터 약 5주간 운영을 시작한 '피에르 상 at 루이비통' 전경. [사진 루이비통]

지난 3월에 문을 연 서울 이태원 구찌 오스테리아의 상황도 비슷하다. 한 달씩 열리는 좌석은 대부분 예약 시작 후 2~5분 사이 모두 마감됐다. 이탈리아의 유명 셰프 마시모 보투라의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이곳은 구찌가 전 세계 네 번째로 문을 연 공간이다. 메인 다이닝룸 28석, 테라스 36석으로, 5~7개의 코스 메뉴를 중심으로 다양한 단품 메뉴와 와인 등을 낸다. 7코스 기준 가격은 1인당 17만원이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서울에 구찌가 낸 레스토랑은 6월까지 모든 좌석의 예약이 완료됐다. [사진 구찌]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서울에 구찌가 낸 레스토랑은 6월까지 모든 좌석의 예약이 완료됐다. [사진 구찌]

그동안 패션 매장에서 카페를 내는 경우는 많았지만 유명 셰프와 협업해 본격적인 다이닝 코스를 낸 명품 브랜드는 국내서 구찌가 최초다. 루이비통 역시 한정된 기간에만 운영되는 레스토랑이지만, 메뉴는 물론 접객과 서비스 모두 최고급 미식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옷과 가방을 만들던 이들이 왜 굳이 까다로운 파인 다이닝에 도전하는 걸까.

구찌 접시 위 음식, 구찌 수트 입고 접객

“체류 시간 때문이죠.”

브랜딩 전문가 최원석 필라멘트앤코 대표는 이들 명품 브랜드의 다이닝 공간을 “브랜드를 경험하는 절대 시간을 늘리려는 시도”로 해석했다. 옷이나 가방을 구경하러 매장을 들르면 길어도 한 시간을 넘기기 어렵지만 레스토랑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다 보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더구나 수백만원대 명품 가방은 일 년에 한 번 사기도 어렵다. 물건 구매에만 의존하기보다 일상적으로 브랜드를 소비할 수 있는 방편으로 식음료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최 대표는 “지금은 브랜드가 너무 많고 개별 브랜드를 경험하는 시간은 점점 줄고 있다”며 “브랜드 다이닝 공간이든 팝업 공간이든 오래도록 머물면서 그 브랜드를 흠뻑 느끼고 가라는 의미”라고 했다.

패션 브랜드 랄프로렌이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카페 브랜드 랄프스 커피. [사진 랄프로렌]

패션 브랜드 랄프로렌이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카페 브랜드 랄프스 커피. [사진 랄프로렌]

긴 시간 머물게 하려면 양질의 콘텐트가 필요하다.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경험보다 더 직관적으로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미식 경험이 주목받는 이유다. 물론 미식 경험은 단순히 음식의 맛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2일 찾은 구찌 오스테리아는 온통 구찌, 구찌였다. 의자와 테이블, 스툴, 테이블 위 접시와 집기들은 모두 홈컬렉션 ‘구찌 데코’의 제품들이었고,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벽지와 조명, 바닥재 등에선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수석디자이너의 미학이 엿보였다. 직원들은 세심하게 짜인 이탈리안 코스 메뉴를 구찌 로고가 수놓인 수트를 입고 날랐다.

단순히 음식 뿐 아니라 가구와 집기, 인테리어가 모두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세심히 설계되어 있다. [사진 구찌]

단순히 음식 뿐 아니라 가구와 집기, 인테리어가 모두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세심히 설계되어 있다. [사진 구찌]

이름값만? 최고 미식 경험으로 ‘고급’을 재정의

명품이 흔해진 시대, 이제는 값이 비싸다는 것만으로는 고급스러움을 나타낼 수 없다. 온라인 명품 플랫폼에서도, 당근마켓 같은 중고 장터에서도 1000만원짜리 명품 가방을 사고판다. 클릭해 손에 넣는 명품 가방에 더는 고급스러운 오라(aura)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것은 어떨까. 특별한 날, 좋은 옷을 입고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 4층의 레스토랑에 간다. 공간에 들어서면 디자인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가 루이비통 가구 컬렉션을 위해 디자인한 오리가미 꽃(종이로 접은 꽃)이 천장을 수놓고 있다. 벽에는 박서보 작가의 그림이 자리한다. 레스토랑 한쪽에는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제품인 트렁크로 만든 오브제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지난 2015년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 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에 함께 참여했던 피에르 상 셰프가 직접 준비한 여덟 코스의 음식과 와인이 제공된다.

한국의 박서보 작가 그림이 걸려있는 피에르 상 루이비통 전경. [사진 루이비통]

한국의 박서보 작가 그림이 걸려있는 피에르 상 루이비통 전경. [사진 루이비통]

“좋은 물건은 쌔고 쌨지만, 좋은 경험은 진귀하죠.”  

이정민 트렌드랩 501 대표는 명품 브랜드가 다이닝 공간을 통한 경험 제공에 방점을 찍는 이유에 대해 “시각에서 촉각, 후각에서 미각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감각을 통해 극대화된 고급스러움을 온전히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단순히 가방이나 옷만이 아니라, 브랜드 가치를 파는 명품에 이처럼 완성도 있는 고객 경험 설계는 중요한 요소다.

브랜드의 대표 제품을 커피로 표현해 제공하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 IWC의 카페. [사진 롯데백화점]

브랜드의 대표 제품을 커피로 표현해 제공하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 IWC의 카페. [사진 롯데백화점]

“이렇게 살고 싶다”…브랜드 세계관에 스며드네

구찌 오스테리아는 현재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마시모 보투라 셰프의 음식을 낸다. 단순히 맛만 좋은 것이 아니라, 버리는 자투리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으로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등 자신만의 철학을 담는다. 예를 들어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의 끝부분은 흔히 사용하지 않고 버리는데, 이것으로 칩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프랑스 고속철 테제베(TGV)에 비빔밥을 납품했던 이력이 있는 한국계 프랑스인 피에르 상 셰프는 한국적 재료를 활용한 프랑스 요리를 선보인다. 피에르 상 at 루이비통에서도 명이나물을 곁들인 스테이크나 쌈장 소스 등을 낸다. 두 문화의 세련된 어우러짐은 문화와 예술을 중시하는 루이비통의 세계관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정민 대표는 “지금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그 브랜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판매하는 시대”라며 “이른바 ‘구찌적인 삶’‘루이비통적인 삶’이 어떤 것인지 레스토랑에서 시간을 보내고 즐기면서 보다 직관적으로 체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명품 브랜드의 레스토랑 오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는 한국 파인 다이닝 업계의 상황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해외 여행길이 막히면서 최근 고급 식당에 대한 수요가 훌쩍 높아졌다. 강지영 음식 평론가는 “(이들 레스토랑은) 단순히 유명 브랜드와 유명 셰프의 만남이 아니라 디테일(세부)을 살린 메뉴 구성과 공간 설계 등 높은 수준의 미식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며 “이런 문화를 받아들일 만큼 국내 미식 업계가 성장했기에 미국이나 유럽, 일본처럼 명품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식음료 업장은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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