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회고록 『풍운의 별』을 펴낸 박정인씨|「참 군인의 길」 후대에 알리고 싶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회고록 『풍운의 별』을 펴낸 박정인씨 (62)는 때와 곳을 가리는 법 없이 사람을 만나면『나 박정인 장군이오』라고 자기 소개를 한다.
그가 자기 이름 아래 무인으로서는 극존칭인 장군 호를 스스럼없이 붙이는 뜻을 오랜 유가의 범절에 젖은 사람들이 비상으로 아는 「건방진 자존의 행태」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박씨는 애국심이나 인격을 논하는 자리에 최말짜인 이등병과 「별자리」가 따로 나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장군」하면 3성·4성은 돼야 제대로 행세하는 세상에서 겨우 별 하나로 은퇴해야 했던 불운의 예비역 군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나 박정인 장군이오』라고 큰소리로 자기 소개를 할수 있는 것은 30년 가까이 풍운을 헤치며 걸어온 군인의 길이 한점 티도 섞이지 않은 강정의 표본이었고 그 무기의 삶이 그 자신 어찌어찌 1성이나마 장군 소리를 듣는 「별자리」로 설정을 이뤘다고 믿는데서 연유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풍운의 별』은 박씨가 보병 제33사단 (일명 백골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하던 70년대 초 그날 그날의 일기와 메모를 바탕으로 초해 놓았던 논픽션 『백골 사단장』 (가제)에 그 전후의 삶의 자취를 덧붙여 아예 일대기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초고로 꾸밈없이 뼈대는 세웠으되 전진을 마시고 산 백골의 문장력이 마음 놓이지 않아 군 후배인 작가 박경석씨에게 감수를 맡겼다.
한때 어느 대통령의 전기 작가로 지명되고서도 용기 있게 그 집필을 거부했을 만큼 깐깐하게 정과 의를 따지고 드는 박경석씨는 두말없이 그의 감수 요청을 수락했다. 그를 「책임져야할 때 책임을 질줄 아는 용기의 소유자이며 영달과 부의 축적에 눈팔지 않고 끝까지 군인 정신을 지킨 인물」로 높이 평가했기 때이다.
감수자는 손수 제목을 붙여주었다는 회고록 『풍운의 별』은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성과 교훈적 의미 외에도 한 개인의 굽이진 과거사를 눈앞에 재현해 보여주는 듯한 생생한 재미로 얽어져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인씨는 명승지 부전고원을 허리에 두른 함남 신흥군 하원천면 중흥리에서 태어났으며 중학 재학 시절인 46년3월의 함흥 반공 학생 사건에 참여했다가 이듬해 월남, 48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 경비 사관 학교에 입교함으로써 30년 가까운 군 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돼 있다.
창군 요람기 생도 시절 겪었던 갖가지 애환, 두달간의 교육 훈련을 거쳐 48년7월28일 소위로 임관되고, 좌우가 난마처럼 얽힌 어수산한 시국 속에 여순 반란 사건, 대구 폭동, 그에 이어지는 숙군의 회오리를 헤치며 보낸 위관 시절의 이야기들은 감동과 흥미를 함께 안겨 소중한 증언이다.
회고록 『풍운의 별』을 관류하는 가장 소중한 정신은 그가 세속적 욕심이나 영%%%에 초탈한 참 군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감히 드러낼 수 있는 엄정한 비판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회고록에서도 거듭 밝히고 있듯이 박씨는 우리 국군이 현대 군사를 통틀어 상당 기간 제대로 정기를 세우지 못하고 표류하는 인상을 주어온 것은 창군 때 식민지 시절 일본군으로 활동했던 인사들이 군의 기둥으로 우리를 잡는 사내를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은 명확한 과오였으며 나는 한국의 정지·경제·사회 각 분야의 혼돈은 이런 가치관의 전도 사상에서 연유됐다고 보는 이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6·25전란과 관련, 일본군 병기소좌 출신인 당시의 육군 총 참모장 채병덕이 보였던 대응전략에 대한 그의 평가는 한마디로 참담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신랄하다.
『채병덕은 취임 후 두달만인 50년6월10일 북한 측 동향이 수상하다는 정보가 입수됐음에도 불구하고 병법에서는 금기로 하는 주요 지휘관 경질 인사를 단행하는 무모한 정책을 썼습니다.
또 취임하자마자 공용화기 회수 지시를 내려 국군의 화력과 기동력을 묶어버렸고 농번기라는 이유로 전후방 부대 장병들에게 대대적인 휴가를 실시하는가하면, 6월 위기설에 대비해 발령했던 비상경계령을 하필이면 남침 전날인 6월24일 해제하는 등 납득할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가 당시 취했던 각종 조치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함께 사상까지도 의심해야 할 정도로 김일성의 남침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인 결과가 돼버렸어요.』
그는 또 전쟁 당시 우리 국군이 저질렀던 아름답지 못한 군기 이탈 행위들에 대해서도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교훈으로 간직할 것을 권고한다. 『돌이켜보건대 북진의 흥분 속에서 우리 국군이 저지른 많은 불미의 사건들에 철퇴를 가했던 것이 바로 중공군의 개입이라고 생각합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51년 가을 북진을 계속하던 중 평북 성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생포됐는데 3개월간의 포로 생활을 거쳐 영하 30도 이상의 혹한을 뚫고 탈출하기까지의 전말을 담은 「적지 돌파 2천리」는 특히 감명을 안겨주는 기록이다. <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