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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윤석열 대통령의 거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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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수집품 기증 1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나온 업경대(앞). 생전에 지은 모든 잘잘못이 거울에 비친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조각은 사찰에서 큰북을 올렸던 법고대다. [중앙포토]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수집품 기증 1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에 나온 업경대(앞). 생전에 지은 모든 잘잘못이 거울에 비친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조각은 사찰에서 큰북을 올렸던 법고대다. [중앙포토]

투박하면서도 성기지 않다. 무서우면서도 정감이 간다. 눈을 부릅뜨고 송곳니를 드러냈지만 백수의 왕자 사자의 얼굴엔 설핏 웃음기도 맴돈다. 사자 등판엔 큼지막한 조형물이 얹혀 있다. 활짝 핀 연꽃 위에 불꽃이 이글거리고, 그 복판은 동그랗게 파여 있다. 거울이 있던 자리다.
 업경대(業鏡臺)다. 전시품에 짧은 설명이 달려 있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 왜 이것에 끌렸을까. 어제(8일) 부처님 오신 날 직전에 마주친 감흥에 내일(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기대, 혹은 걱정이 겹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 기증된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컬렉션 2만3000여 점 가운데 알짜 355점을 뽑은 ‘어느 수집가의 초대’ 특별전(8월 2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다.

이건희 기증품전에 나온 업경대
선행과 죄업은 저승까지 이어져
문 정부 과오도 나침반 삼아야

 이번 전시는 진수성찬이다. 국보 13점, 보물 20점에 정선·김홍도·정약용·박수근·이중섭·김환기는 물론 인상파 화가 모네까지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한데 어울렸다. 이런 명품에 비하면 업경대는 초라하다. 색깔도 벗겨지고, 작품의 눈인 거울도 사라졌다. 제작자도, 출처도 모른다. 전체 형태로 볼 때 1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유산에서 불상·불화·불탑이 주전 선수라면 업경대는 후보 선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사찰 예식에선 빠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업경대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허물을 살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가이드 역할도 했다. 염라대왕의 지물(持物)로, 생전의 선행과 죄업이 거울에 낱낱이 나타나 극락과 지옥행이 결정됐다고 한다.
 거울은 반성·성찰의 상징이다. 시인 이상은 ‘거울’에서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원문은 띄어쓰기 없음)라고 했으며,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고 했다.
 윤석열 당선인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내일은 대통령 자격으로 국민과 처음 만나는 날인 만큼 단장에도 꽤 신경을 쓰지 않을까 싶다. 대선후보와 당선인 시절의 힘겨웠던 장면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한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역대 여느 대통령에 비할 수 없는 악조건에서 출발하는 그의 앞에는 지금 ‘파란 녹이 낀 (시대의) 구리거울’이 놓여 있다. 정치는 극한대치요, 경제는 첩첩산중이고, 국제정세는 일촉즉발이다. 더욱이 내각조차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개문발차하는 형국이다. 검찰·관료 출신 중용이라는 좁은 인선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이른바 사면초가다. 과연 그가 이런 ‘파란 녹’을 걷어내며 ‘공정과 상식’이란 화두를 실천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통치에 쾌도난마는 없다.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특히 반대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대통령의 업보다. 시인 이상이 실마리를 던져준다. 오른손잡이인 그는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라고 했다. 반면에 현실의 대통령은 얼마든지 왼손잡이와 손잡을 수 있다. 그게 거울이 주는 깨우침이다. 오죽하면 끝까지 상대를 탓하며 무력하게 물러나는 문재인 대통령조차 “우리 정부가 부족했던 점을 거울삼아서 더욱 잘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라 했을까. 문 대통령의 진의와 관계없이 새 대통령이 나침반으로 삼을 만하다.
 박물관 업경대 바로 곁에는 19세기 법고대(法鼓臺)도 놓여 있다. 불법을 전하는 사찰 법고(큰북)를 떠받친 목조각이다. 민생이란 막중한 짐을 지고 있는 통치자의 책무마저 연상된다. 용산시대를 열어가야 할 윤 대통령, 새 집무실 바로 옆 중앙박물관을 한번 둘러보시라. 고난의 역사를 증언해 온 예술품, 나아가 민초의 숨소리가 들릴 것이다. 전직 대통령의 악업(惡業)과 결별하는 선연(善緣)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제 승리의 어퍼컷을 접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