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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위기의 대통령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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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건국 초기 미국 대통령의 롤 모델은 유럽의 왕이었다. 선출직이긴 했지만 군주처럼 행동했다. 전횡을 일삼았다는 게 아니라 위엄 유지에 집착했다는 이야기다. 공식 행사 외에는 대중 연설을 하지 않았고, 정책을 직접 설명하면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후보가 자신을 위해 유세하는 것도 금기시됐는데, 1912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비로소 깼다. 대통령의 자리에는 '정치인'과 '국가 지도자'가 공존한다. 민주주의 정치학의 대가 로버트 달은 "미국인은 대통령이 일상적인 정치의 현실 세계와 정치를 초월한 상상의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꼬집었다.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노골적 정파성 일관한 문 대통령 #대통령의 자리 남루하게 만들어 #윤 당선인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미국 정치의 틀을 따온 한국에서도 대통령에 거는 기대는 비슷하다. 물론 제대로 실현된 적은 없다.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기대일 수도 있고, 대통령 개인의 능력·덕성·의지 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겉으로나마 역대 대통령은 정파의 리더가 아니라 국민의 대표임을 자처했다. 대통령들은 때때로 대의를 앞세워 지지층에 등을 돌렸다. 연극이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연극이야말로 대통령이라는 제도를 지켜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후 청와대 본관에서 임기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회가 통과시킨 검수완박 법안을 공포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오후 청와대 본관에서 임기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회가 통과시킨 검수완박 법안을 공포했다. [중앙포토]

그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특이한 경우다. 지지층의 기대를 배반하는 시늉이라도 한 적 있나 싶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정도? 그것마저 대선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로 해석됐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다짐은 취임사 한구석에 화석처럼 박혀 있을 뿐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의 위험을 회피하는 사이 그 직(職)은 위기를 맞았다는 점이다. 정파를 초월한 국가 지도자라는 역할 기대가 사라지면서 대통령제는 회의(懷疑)의 대상이 됐다.

문 대통령의 마지막 국무회의는 대통령직의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시간까지 바꿔가며 검수완박 법안을 처리한 장면은 대통령이란 자리를 남루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미 꺼진 촛불을 들고서 '야반도주' '방탄'이라는 모멸적 힐난은 못 들은 척했다. 옥중의 전임자, 발이 묶인 경제인의 사면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다음 정권에 미루고 말았다. 혹시나 국가 지도자로서 마지막 반전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역시나'로 끝났다. “검찰수사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 선택적 정의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변(辯)은 누워서 침 뱉기다. '검찰수사'를 '대통령'으로 바꿔 보시라.

이번 정부 들어 존재의 취지가 뒤틀어진 헌법기관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 하나가 국회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간접선거로 뽑는 대통령보다 의회, 그중 하원을 인민의 진짜 대표자로 생각했다. 대통령 임기가 4년인 데 비해 하원의원 임기를 그 절반으로 둔 것은 대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미국처럼 임기가 2년이었으면 국회 권력은 어떻게 됐을까. 대선에서 확인된 민심을 고려하면 지금의 국회는 대표성을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폭주하는 여당과 그 뒤에 숨는 대통령은 여전하다.

앞에서 인용한 로버트 달은 현실 정치인이면서도 국가 지도자라는 운명을 지닌 대통령의 비극을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그처럼 높은 기준을 충족시킬 수는 없기에, 우리는 종종 임기 중의 대통령은 맹렬히 비난해 놓고는, 나중에 그를 회고할 때는 높이 평가하곤 한다." 퇴임 후 잊히고 싶다는 문 대통령은 어떨까. '맹렬한 비난'이 '높은 평가'로 바뀔 수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허술한 사법 체계가 문제를 드러낼 때마다 그의 마지막 국무회의는 소환되리라는 점이다.

문 대통령이 "다음 정부는 우리 정부의 성과와 비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속은 좁지만, 말은 맞다. 윤석열 당선인 앞에 놓인 길이 만만치 않다. 임기 중 '맹렬한 비난'은 각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퇴임 후 '높은 평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위기의 대통령직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반면교사가 바로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