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의 독서편지] 내게 큰 힘 됐던 '명심보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명호야! 우리 네 식구 어쩜 이렇게 서로 다 바쁘게 사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그렇게 개구쟁이던 네가 이렇게 점잖아져서 엄마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CD에 녹음도 해 주고 미국으로 일본으로 열심히 다니며 사업하는 걸 보니 대견하다. 간혹 네 주위 사람에게서 젊은 사람이 시간 약속이 칼이고 유머가 있어 참 잘 컸다는 얘길 들으면 난 정말 행복하단다.

엄마가 읽고 좋은 책 그렇게 갖다 줘도 너는 잘 안 읽었지? 이제라도 장시간 비행기를 탈 때는 꼭 책을 갖고 가거라. 오늘은 '명심보감'을 얘기할게. 엄마가 서울서 고 2때 "부친사망"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군산엘 가니 외할아버지께선 엄마 대입 시험에 방해가 된다면서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막내딸 공부시키느라 밭뙈기를 조금씩 팔고 또 팔다가 군산 외항의 칼바람 부는 선창가에서 폐렴에 걸려 50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버지 유품 하나는 간직하고 싶어 둘레둘레 찾다가 아버지께서 원두막에서 비오는 날 늘 읽으셨던 누런 책 한 권을 들고 서울로 왔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면 이 엄마는 책을 펴고 여기도 아버지께서 보셨을 거라고 생각하며 책을 얼굴에 비비다가 꼭 껴안고 잤었다.

그 후 결혼하고 네가 중학교 때 엄마.아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었다. 엄만 그때 MBC 연기대상.인기상 등을 타며 승승장구했고, 하루 저녁 CF가 무려 6편이나 방영되기도 했었다. 한데 아빠한테 누가 생겼다는 소문이 들리고, 아빤 외박이 잦았다. 자주 다퉜었고,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엄만 이해할 수 없었다. 살림 잘해 요리 잘해 연기 잘해 돈 잘 벌어…. 왜! 뭐가 불만인가. 결국 극도로 싸우고 이혼을 결심했었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막내딸이 이렇게 괴롭고 불행해진 걸 아시는지. 서재에서 먼지가 앉은 '명심보감'을 꺼내 '아부지! 아부지!'하고 울다가, 책을 펴보았다. '네 두레박 줄이 짧은 건 모르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하지 마라'는 글이 퍼뜩 눈에 들어오더구나. 엄마는 책을 덮고 생각을 해 봤다. 아빠가 가까이 오면, 안 돼! 새벽에 나가야지! 피곤해! 라면서 아빠 자존심 상하게 뿌리쳤고 촬영이니 뭐니 한달에 열흘 이상을 못 들어 오기도 하던 때였다. 그 글을 읽은 날 엄마는 일주일째 안 들어오는 아빠를 찾아나섰다. 사무실 직원과 안양공장을 가보니 88올림픽 호돌이 마스코트 상품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더구나. 이미 올림픽은 끝났는데, 백화점 등에 납품한 물건도 예상대로 안 팔리고….

수소문 끝에 어느 여관에서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아빠를 찾았단다. 그날 엄마는 아빠를 보듬고 진심으로 빌었다. 그때 엄마와 아빠가 갈라섰다면 엊그제 우리 식구 새벽까지 국수말이 먹으면서 신나게 고스톱 치고 놀 수 있었겠니?

명호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상대가 나에게 소홀히 한다거나 배신감이 느껴진다거나 할 땐 내 두레박 줄을 먼저 재 보거라. 간혹 턱 없이 짧을 때도 있을 것이다. 또 인격이 낮은 사람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나이는 신의와 의리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너무 급하게 열매를 남이 따갈까봐 미리 꽃을 따버리지는 마라. 외국 갈 때 비행기 안에서 꼭 책을 읽고, 엄만 우리 아들 너무나 사랑한다.

김수미(탤런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