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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엔숍이 300엔숍 됐다...'1000조엔 함정' 빠진 日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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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지난 15일 일본 도쿄(東京) 긴자(銀座)에 있는 ‘마로니에게이트2’ 빌딩에 문을 연 다이소 매장은 기존 점포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고급스러운 목재 진열대에 식기와 문구, 각종 소품이 정갈하게 디스플레이되어 있다. 다이소는 100엔(약 967원)대 저가의 상품을 판매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100엔숍’ 브랜드. 하지만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상품에는 300엔이 넘는 가격표가 달렸다.

24일 오전 손님들로 붐비는 일본 도쿄 긴자의 다이소 매장. 300엔 이상의 물품들로 매장을 꾸몄다. 이영희 특파원

24일 오전 손님들로 붐비는 일본 도쿄 긴자의 다이소 매장. 300엔 이상의 물품들로 매장을 꾸몄다. 이영희 특파원

다이소가 기존 정체성을 버리고 긴자에 ‘300엔숍’을 오픈한 건 전 세계적 물가 상승의 영향이다. 중국이나 동남아 등에서 들여오는 상품 가격과 물류비가 오르면서 100엔 균일 판매로는 도저히 이익을 내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다이소는 아예 300엔 이상 ‘고가(?) 상품’을 취급하는 새 브랜드인 ‘스탠다드 프로덕트’, ‘쓰리피’를 만들어 앞으로 관련 매장을 늘려갈 계획이다.

올해 들어 일본의 소비자 물가 상승은 피부로 느껴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100엔샵과 더불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편의점 도시락·튀김·샐러드 등의 가격도 지난 3월부터 2~15% 올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물류비용이 상승한 데다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원자재 가격도 급등하자 편의점들이 일제히 제품 가격을 올린 것이다.

‘나쁜 엔저’가 부른 ‘나쁜 인플레이션’ 

19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오는 5월부터 도쿄전력의 전기 요금은 지난해 같은 달 대비 25%, 도쿄가스 요금은 24% 오른다.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 광열비는 더 인상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 도쿄 긴자 다이소 매장에서 판매하는 식기류, 대부분 300~500엔대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도쿄 긴자 다이소 매장에서 판매하는 식기류, 대부분 300~500엔대다. 이영희 특파원

패션업체도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의 자라’로 불리는 패스트패션 업체 ‘시마무라’는 올 가을·겨울 시즌 의류 가격을 평균 3~4% 인상한다고 밝혔다.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패스트리테일링 대표도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가격 인상을 예고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게 최근의 엔저(円低) 현상이다. 대표적인 안전 자산으로 여겨지던 엔화의 가치가 추락하며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20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장중 129.41엔까지 치솟아 2002년 4월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원·엔 환율도 같은 날 장중 100엔당 955.58원 수준까지 내려갔다.

엔·달러 환율 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엔·달러 환율 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엔화 가치 하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정부가 초저금리로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금리 인상을 이어가는 미국과 금리 차이가 벌어지면서 투자자들이 엔화를 팔고 달러 구매에 나서고 있다.

과거에는 엔저가 일본 수출 기업의 이익을 늘려 근로자들의 임금을 올리고 일본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좋은 엔저’ 논리가 작동했다. 하지만 일본 제조업체들이 해외로 거점을 대거 옮기면서 엔저가 수출에 주는 영향은 크게 줄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지난 20일 발표된 일본의 3월 무역 수지는 마이너스 4124억엔으로 8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오히려 현재 일본에선 엔화의 가치 하락이 원유, 수입 원자재, 수입 상품 가격을 상승시켜 소비자 물가 인상으로 이어지는 ‘나쁜 엔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랜 기간 디플레이션을 겪은 일본에 물가 상승은 일정 정도 필요하지만, 임금 인상으로 시중에 돈이 풀려 물가가 오르는 ‘좋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엔저로 인한 원자재 가격 상승 때문에 일어나는 ‘나쁜 인플레이션’이라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르는 일본 물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오르는 일본 물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일본 정부, 소비세 인하로 맞서나 

일본 정부도 예상보다 빠른 엔저 현상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표적 ‘엔저론자’인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도 18일 급격한 엔화 가치 하락이 “경제에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스즈키 슌이치(鈴木俊一) 재무상도 “지금처럼 원유 등 원자재 가격이 세계적으로 급등하는 상황에서 엔저는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소비자와 기업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이른 시일 내 저금리 정책을 전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본의 국채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1000조엔(약 9679조원)을 넘었는데, 일본 은행이 금리를 1~2%포인트 올리면 정부의 연간 원리금 부담액이 3조7000억~7조 5000억엔씩 늘어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감세나 현금 지원 등을 통해 국민의 생계 부담을 낮추는 방식으로 물가 상승에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김명중 닛세이 기초연구소 수석 연구원은 “소비세 인하와 기름값 보조, 현금 지원 등의 정책을 쓸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21일 닛케이에 따르면 물가 상승에 대한 긴급종합대책을 마련 중인 일본 정부는 보육 수당을 받는 가구에 한해 아이 1인당 5만엔씩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검토에 들어갔다.

에너지 가격 상승에 대비해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는 주장도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지난달 28일 닛케이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안전이 확인된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는 응답은 53%로 나타나 6개월 전에 비해 9%포인트 증가했다. “재가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답은 6개월 전보다 8%포인트 감소한 38%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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