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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국에 진다…G7 뺏길것" 일본인에 팩폭 날린 日석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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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일본은 20년 후 경제규모에서 한국에 추월당한다.’

‘월급이 오르지 않은 일본과 오른 한국, 무엇이 다른가.’

지난해 12월 12일 일본 경제전문 미디어인 ‘겐다이비즈니스(現代ビジネス)’와 ‘도요게이자이(東洋経済)’에 나란히 실린 칼럼의 제목이다. 글을 쓴 사람은 일본의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81)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 출신인 그는 일본경제·금융이론 분야의 석학으로 불린다. 그는 왜 연일 한국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글을 써 일본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을까. 지난해 12월 29일, 노구치 교수를 줌(ZOOM)으로 인터뷰했다.

일본 경제 상황에 연일 경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노구치 유키오 일본 히토츠바시대 명예 교수. [사진 노구치 교수 제공]

일본 경제 상황에 연일 경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노구치 유키오 일본 히토츠바시대 명예 교수. [사진 노구치 교수 제공]

일본 경제의 위기를 설명하는데 한국의 데이터를 적극 인용하고 있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일본인들은 한국을 경제적으로 일본보다 뒤처진 나라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한국은 1인당 GDP나 임금 수준 등에서 일본을 이미 넘어섰거나 넘어서려 하고 있다. 많은 일본인이 ‘한국에 진다’는 사실에 신경을 쓰고 있다.
실제로 한ㆍ일 경제 역전이 현실화할까.
많은 지표에서 한국은 이미 일본을 앞질렀다. 실질임금은 수년 전에 높아졌고, 국가경쟁력 순위도 일본보다 위다. 디지털화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선진국의 기준이 되는 1인당 GDP는 일본이 현재 4만 달러, 한국이 3만 1000달러 수준으로 일본이 높다. 하지만 일본이 2000년부터 20년간 1.02배 성장한 데 비해 한국은 2.56배 성장했다. 이대로라면 몇 년 후에는 확실히 한국이 일본을 추월한다.
한국이 일본 대신 주요7개국(G7)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G7은 선진국들의 모임이지 않나. 이런 말을 하면 일본인들은 싫어하겠지만, 이 추세라면 20년 후 일본은 분명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한-미-일 1인당 명목 GDP 추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한-미-일 1인당 명목 GDP 추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한-일 실질임금 추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한-일 실질임금 추이.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2020 주요국 1인당 명목 GDP.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2020 주요국 1인당 명목 GDP.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일본의 경제적 위상이 추락한다는 예견은 노구치 교수만의 주장이 아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계열 연구기관인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지난달 발표한 ‘아시아경제 중기예측 보고서’에서 일본의 1인당 GDP가 2027년에는 한국에, 2028년에는 대만에 따라잡힐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역전’이 일어나는 이유는 일본의 낮은 노동생산성 때문이며, 그 바탕에는 ‘뒤처진 디지털 개혁’이 있다고 센터는 분석했다.

일본 경제가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뭔가.
침체는 1990년대 중반부터 계속됐지만 가속한 건 ‘아베노믹스’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금융 완화로 의도적인 엔저(低) 정책을 폈다. 엔의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의 이익은 늘어난다. 그런데 이런 이익이 노동자들의 임금 향상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달러로 환산되는 GDP는 당연히 낮게 나타난다.
아베노믹스가 실패했다는 이야긴가.
방향이 완전히 잘못됐다. 경제가 침체에서 탈피하는 길은 기업들이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엔저로 쉽게 이익을 얻은 기업들은 그걸 하지 않았다. 한국의 경우, 수출 중심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원화 약세를 유도하는 금융 정책을 취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의 충격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본다. 
일본의 늦은 디지털화도 주요 이유로 꼽힌다.
1970년대만 해도 일본은 은행의 자동입출금기(ATM)를 개발하는 등 첨단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인터넷 시대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문제는 조직 간에 소통이 막힌 ‘다테와리(たてわりㆍ세로로 쪼개짐)’ 행정 문화다. 인터넷은 정보 공유가 핵심인데 그게 안됐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정부 기관들이 화상회의를 하려 했는데 각 부처가 독자적인 통신시스템을 쓰고 있어 못 했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있다.
지난 4일 도쿄 간다묘진 신사에서 사람들이 새해 사업 번창과 경제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4일 도쿄 간다묘진 신사에서 사람들이 새해 사업 번창과 경제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도쿄대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노구치 교수는 경제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대한 100여권의 책을 출간했다. 시간 관리·공부 방법을 다룬 ‘초(超) 정리법·학습법’ 시리즈는 1990년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특히 영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일본인의 영어 실력 저하 문제를 자주 지적한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플 iBT 점수로 볼 때 한국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홍콩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역시 외환위기 이후 세계로 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사회 전반에 공유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아시아 29개국에서 27위다. 이런 실력으론 세계 무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한국 경제는 이대로도 괜찮을까.
제조업 비율이 30% 이상으로 높고 외수 의존형 경제라는 점은 불안하다. 미·중 경쟁과 신흥국의 추격이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제조업 비율이 10% 정도로 낮고 정보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구조로 전환한 미국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또 삼성 이외에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더 나와야 한다.
인구 문제도 심각한데.  
한국의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장기적으로 성장을 가로막는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일본 젊은이 중엔 ‘한국 같은 경쟁 사회는 싫다’ ‘이대로가 좋다’는 사람도 많다.
이대로 좋을 리 없다. 이대로만 하다 보면 일본의 국력은 점점 하락하고 개인의 삶도 힘겨워질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일본의 복지·간병 분야엔 외국인 인력이 꼭 필요한데, 임금 수준이 점점 낮아지면 외국인 노동자들은 일본 대신 한국이나 중국으로 가려 할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위기의식을 가지라’ ‘눈을 뜨라’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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