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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사도광산, 조선인 징용 흔적은 딱 두줄 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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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아니 이 계절에 거길 왜 가요? 요새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텐데…."

지난 9일 오후 일본 니가타(新潟)항 여객선터미널, 사도(佐渡) 섬으로 가는 배를 함께 기다리던 60대 여성이 "사도광산에 가려 한다"는 기자에게 말했다. 눈이 금세 쏟아질 듯 무거운 하늘, 사도 섬에서만 30년 넘게 살았다는 여성은 "눈길 조심하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본 사도광산 갱도 유적 내부에 에도시대 광산 노동자들의 모습이 마네킹으로 재현돼 있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사도광산 갱도 유적 내부에 에도시대 광산 노동자들의 모습이 마네킹으로 재현돼 있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니가타현 사도 섬에 있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추천했다. 덕분에 사도광산이 연일 화제에 올랐지만, 일본인 중에도 이곳에 가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 혼슈(本州)의 북쪽, 전국 어디서도 이동하기 쉽지 않은 거리 탓이다. 도쿄(東京)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2시간, 니가타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70분을 가면 사도 섬 료쓰(兩津)항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70여분, 섬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야 사도광산에 도착한다. 오가는 버스가 많지 않아 중간에 갈아타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하는 사도광산.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하는 사도광산.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유적 입구에 축하 플래카드 걸려

사도광산은 원래 사도섬에 있던 40여개 광산을 통칭하는 말이었지만, 이번에 유네스코에 추천된 곳은 섬의 서북쪽에 있는 아이카와·쓰루시(相川·鶴子) 금은(金銀)산과니시미가와(西三川) 사금(砂金)산이다. 이 중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아이카와 금은산에는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조선인 노동자가 대거 동원돼 구리와 철, 아연 등의 전쟁 물자를 채굴했다.

메이지시대 이후 사용된 사도광산 도유 갱도 유적. 이영희 특파원

메이지시대 이후 사용된 사도광산 도유 갱도 유적. 이영희 특파원

10일 오전 아이카와 금은산 유적지에 도착하니 관람객은 기자 한명 뿐이다. 입구에는 '축! 유네스코 국내 추천 결정!'이라고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산 구석구석을 돌며 금광의 흔적을 살피는 투어 코스도 있지만, 12월~3월엔 운영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관람 가능한 곳은 에도시대 금광 일부를 재현한 소다유(宗太夫) 갱도와 메이지(明治)시대(1868년~1912년) 이후 사용된 도유(道遊) 갱도다.

먼저 소다유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약 500m의 구불구불한 지하 갱도에 에도시대 수작업으로 금을 캤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곡괭이로 땅을 파고, 손으로 흙을 고르고, 이를 물에 띄워 금을 채취하는 모습 등이다. 어두컴컴한 갱도 천장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마네킹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려온다. 갱도 중간에서 한 커플 관람객과 마주쳤다.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길래 한번 들러봤는데, 으스스하네요"라고 짧게 말했다.

메이지시대 이후 사용된 사도광산 도유 갱도 유적. 이영희 특파원

메이지시대 이후 사용된 사도광산 도유 갱도 유적. 이영희 특파원

메이지 이후 조성된 도유 갱도 유적은 꽤 길다. 비교적 널찍하게 정비된 굴이 1.5㎞ 정도 이어진다. 바닥에는 당시 광물을 실어날랐던 철길의 흔적이 있고, "(메이지 시대) 구미(歐美)에서 도입된 선진적 광업 기술로 금은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현재 관람 가능한 사도광산 유적의 대부분은 메이지 시대 이후 모습이지만, 일본 정부는 '에도시대의 사도광산'으로 기간을 한정해 유네스코에 추천서를 냈다.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곳으로 사용됐던 광산의 '어두운 역사'를 가리려는 시도다.

한때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광산 유적 입구와 시내 호텔, 여객 터미널 등에서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추천을 축하하는 포스터와 플래카드가 휘날렸지만,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평일이라선지 섬의 중심지에도 지나다니는 이들이 거의 없다. 50대 택시 기사는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를 간절히 바라는 건, 그것이 사도섬이 살아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도광산 유적지 입구에 유네스코 추천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영희 특파원

사도광산 유적지 입구에 유네스코 추천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영희 특파원

면적 855㎢로 일본 본토를 제외한 섬 중엔 두번째로 큰 사도 섬은 금이 생산되던 에도시대 전국에서 10만 명이 몰려들었다.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도쿠가와 막부의 지갑'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가 12만명에 달했고, 전국에서 연간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왔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육지로 떠나면서 현재 인구는 5만명으로 줄었고, 이 중 48%가 65세 이상 고령층이다.

섬이 활기를 잃자 방문객도 급감, 한때 도쿄 직항편이 있던 사도 공항은 2014년 문을 닫아야 했다. 지난해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겹치며 관광객 수가 25만명에 그쳤다. "사도 섬엔 젊은 사람들을 모을 산업이 없어요. 세수가 줄어서 재정도 좋지 않죠. 유네스코 등재에 희망을 거는 사람이 많은 데 잘 될 수 있을지…." 관광객 안내도 겸업하고 있다는 택시 기사가 말을 이었다.

“조선인이 일했던 사실 알려야”

사도광산에서 조선인이 일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는 주민도 있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후반기 이곳에 1200~2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일했다. 아이카와 유적지에서 만난 40대 여성은 "한국이 (유네스코 등재에) 반대한다고 해서 놀랐다. 조선인들이 일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면서 "조선인이 와서 일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등재를 추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도광산에 있는 부유선광장. 채취한 광석을 분류하고 제련하는 설비로 1938년에 완성됐다. 이영희 특파원

사도광산에 있는 부유선광장. 채취한 광석을 분류하고 제련하는 설비로 1938년에 완성됐다. 이영희 특파원

지난 10년간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온 '사도를 세계유산으로 하는 모임'의 나카노 코우(中野洸) 회장은 "사도 주민들은 이곳에 금광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면서 "역사 문제는 나라와 나라 간에 풀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조성된 사도광산 유적에선 이곳에서 힘겹게 일했던 조선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메이지 시대 광산 안내문 십여 개에도 당시 조선인이 동원돼 일했다는 설명은 없다. 단지 광업 기계 전시장 벽 한쪽에 붙어있는 '사도광산 근대사 연표' 에서 '조선인'이란 단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쇼와(昭和)14년(1939년) 노동동원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동원이 시작', '쇼와20년(1945년) 9월 패전에 의해 조선인 노동자가 귀조(帰朝, 조선으로 돌아감)' 딱 두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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