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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살인' 이은해 영장 한번 안쳤던 檢…'검수완박'에 입열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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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무능함으로 피해자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이 묻힐 뻔했다.”
지난 15일 한 검사가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이다. 2019년 경찰이 변사로 내사 종결한 계곡 살인사건을 지휘한 검사다. 그는 “부끄럽지만, 이 사건이 언론보도 됐을 때 사건 발생 장소와 시기에 비추어 ‘당시 의정부지검에서 영장전담 검사였던 제가 변사사건을 지휘했겠구나’ 짐작했으나, 어렴풋이 성인 남성이 아내, 지인과 함께 계곡을 갔다가 다이빙을 해 사망한 사건이 있었던 정도만 기억이 날 뿐이었다”며 “피해자분과 유족분들께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을 뿐”이라고 적었다.

[현장에서]

 '계곡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은해가 19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계곡살인' 사건의 피의자 이은해가 19일 오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살인인데 구속영장 안 치다 결국 공개수배 

2019년 6월 30일 발생한 경기도 가평군 용소계곡의 윤모(당시 39세)씨 살인 사건은 4개월간 경찰이 조사한 뒤 범죄 혐의점이 없다고 보고 그해 10월 내사 종결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뒤 살인 피의자는 잡혔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검찰과 경찰의 행태에 국민의 의구심은 여전하다. 내사 종결한 검사도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다’는 상황에서 검찰과 경찰은 국민에게 어떤 설명을 했을까.

검찰과 경찰은 늘 한 발짝씩 늦었다. 내사종결이 불합리하다 생각한 유족이 직접 사건 정보를 모아 경찰에 건넸고,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면을 파헤쳤다. 네티즌수사대의 끊임없는 의혹 제기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힘이었다. 검찰과 경찰은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국민 앞에 드러난 현실은 황당했다.

국가수사본부 전경. 경찰청 제공

국가수사본부 전경. 경찰청 제공

강력한 용의자 2명은 2차 검찰 소환을 앞두고 도주했고, 그들을 쫓던 검찰은 결국 공개수배라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국민의 제보를 바란다는 보도자료까지 냈다. 2년이 넘는 수사 기간에 단 한 차례의 구속영장도 신청·청구하지 않은 결과다. 살인 혐의를 받는 피의자들의 신병을 확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결과다.

국민과 언론에 사건 브리핑도 안 해 

더 황당한 일은 검찰과 경찰 모두 전국민적인 관심 사건에 단 한 차례도 공개적인 브리핑을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초지종을 묻는 언론의 질문엔 “수사 중인 사안”이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공개수배를 위한 보도자료에 적은 혐의 내용이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최대한의 서비스였다. 수사 지휘 검사의 해명은 간단했다. “(이씨 등이) 수사에 성실히 참여했고 변호인이 선임돼서 바로 도망갈 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검찰의 유일한 사과는 2019년 내사종결 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이었다. 언제부터 국민이 검사 개인의 SNS 계정과 소통을 했는가.

지난 2년 10개월 동안 수사기관이 보여준 행태는 최근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된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검찰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언론 인터뷰와 기자간담회에 나서고 있다. 20일 이은해 사건 내사종결 지휘가 이뤄진 의정부지검도 기자 간담회를 자처했다.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되면 국민 여러분께 이런 피해가 생깁니다’라는 대검찰청 자료를 바탕으로 국민의 피해가 걱정된다고 강조했다. 간담회에서 이은해 관련 사건에 대해선 “검사도 실수할 수 밖에 없다. 실수를 줄이고 또 다른 절차에서 보완해 주는 게 좋은 것”이라며 “좋은 계기를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검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김현동 기자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검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김현동 기자

알권리는 완전 박탈, 필요할 때만 국민 찾아

계곡 살인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입장은 “검수완박이 됐다면 (계곡 살인) 사건은 기소도 못 한 채 무혐의로 종결됐을 것이다”라는 말로 축약된다. 유족과 언론, 네티즌이 공분했던 수사기관의 책임은 잊히고 있었다.

억울한 사연에 먼저 귀 기울인 건 언론과 네티즌이었다. 그들은 2019년 6월 30일, 이은해와 조현수 일당의 괴롭힘에 힘겨워하던 피해자의 목소리와 가해자의 조롱을 잊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그 영상을 본 유족은 오열했다고 한다. 지난 19일 인천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윤씨의 누나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님의 비통함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부모님 앞에서 내색하기조차 어려운 심정”이라고 했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슬퍼하며 재판부에 엄벌을 촉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법정 밖까지 들렸다.

고통과 조롱 속에 떠난 윤씨의 억울함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2년 10개월이나 정의가 지체된 원인에 대한 국민의 의문 역시 해소되지 않았다. 그 자초지종을 제때 제대로 알릴 책임과 의무가 검찰과 경찰에 있다. 국민과 인권을 위한다면서 정작 국민의 알 권리를 완전히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직에 필요할 때만 국민과 언론을 찾은 것은 아닌지, 검찰과 경찰은 스스로를 돌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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