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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열혈남아'의 불꽃놀이 의미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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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친구를 죽인 철천지원수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놈 고향에 내려간 건달을 녀석 엄마가 친자식같이 보듬어 줍니다. 이거야 원, 어느덧 원수의 엄마와 정이 담뿍 들어버린 건달. 놈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났건만 그 엄마 가슴에 못 박을 짓은 선뜻 못하겠다는 겁니다. 아, 이걸 죽여, 살려?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으려 옥상에 올라 텅 빈 밤하늘을 바라보는 주인공. 그 쓸쓸한 뒷모습 너머로 때마침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집니다.

'열혈남아'(사진)는 제법 찡한 영화입니다. 배우들의 열연에 흠뻑 빠져 있노라면 이 짧은 불꽃놀이 장면이야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불꽃놀이는 대개 의미심장한 상징일 때가 많으므로 한번쯤 곱씹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법입니다.

특히 기타노 다케시 영화가 대표적이죠. 아예 제목부터 '불꽃놀이'로 붙인 영화 '하나비'에는 단 한번, 아주 초라한 불꽃놀이가 등장합니다. 병든 아내를 위해 주인공 니시 형사가 쏘아올리는 한 발의 불꽃. 벼랑 끝에 내몰린 부부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너무 빨리 사라져가는 불꽃의 흐릿한 궤적을 응시합니다. 반면 '소나티네'의 건달들은 아주 원없이 불꽃을 쏘아대죠. 인적 드문 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서로에게 불꽃을 겨누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야쿠자 패거리. 어두운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불꽃놀이는 장차 장렬하게 마감할 그들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한때를 자축하는 것만 같습니다.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 사라지기 시작하는 불꽃놀이에는 어떤 안타까운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T W 아도르노는 "불꽃놀이는 예술의 가장 완전한 형태다. 그 영상이 최고 완성의 순간에 보는 이의 눈앞에서 다시 사라져가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긴 거겠죠. 또 이탈리아의 누군가는 "연인의 키스처럼 덧없는 것"이 바로 불꽃놀이라고 했다는군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휴머니스트)은 특별히 일본 불꽃놀이에 대한 해석을 덧붙입니다. "하늘에는 황홀하게 스러지는 불꽃, 땅 위에는 일제히 피었다가 일제히 져 버리는 벚꽃, 인간들 틈에는 제 몸을 불살라 짧은 삶을 살다 가는 사무라이. 이 세 가지가 일본식 존재미학의 정점"이라는 겁니다. 폭력과 자결의 미학이라 부르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특징, 나아가 일본식 유미주의의 핵심 정서가 이들 불꽃놀이 한 장면에 집약돼 있다는 뜻이겠죠.

'열혈남아'의 불꽃놀이는 얼핏 기타노 다케시의 불꽃놀이를 닮았습니다. 인생 막장에 내몰린 인간이 맛보는 절정이면서 동시에 파국인 한 순간.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살육극을 벌인 뒤 깨끗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본식 존재미학과는 분명 거리가 있죠. 그놈의 정 때문에 건달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마지막 순간조차 엄마 품에 안겨 칭얼대는 이 영화의 질긴 가족주의 정서를 감히 한국식 존재미학이라 불러도 될까요?

내내 고단했던 건달 재문이의 삶이 단 한번 찬란하게 빛나는 때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엄마와 함께 보낸 소소하고 단란한 한때라는 점. 그것이 기타노 다케시의 서늘한 불꽃놀이와 다른 점입니다.

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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