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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단교한 대만, 중국 ‘3통4류’ 공세에 대응 공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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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3〉

장제스(蔣介石) 사망으로 상(喪)중인 행정원장 장징궈를 대신해 국방부장으로부터 육군 2급 상장 계급장을 받는 왕셩, 1975년 2월, 타이베이 중산탕(中山堂). [사진 김명호]

장제스(蔣介石) 사망으로 상(喪)중인 행정원장 장징궈를 대신해 국방부장으로부터 육군 2급 상장 계급장을 받는 왕셩, 1975년 2월, 타이베이 중산탕(中山堂). [사진 김명호]

미·중 수교(1979년 1월) 후, 중국은 발톱을 오므렸다. 미국과 단교(斷交)한 대만에 통전(統戰) 공세를 퍼부었다. 평화통일과 일국양제(一國兩制), 3통4류(三通四流)를 제안했다. 3통은 통우(通郵), 통상(通商), 통항(通航), 4류는 학술, 문화, 체육, 과학기술 교류를 의미했다. ‘대만해방’이라는 전투적인 구호는 폐기했다. 전인대 위원장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내용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대만이 어려울 경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대만인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당시 대만의 1인당 평균소득은 대륙의 30배였다.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중공의 통전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1980년 1월, 육군 2급 상장(上將) 왕셩(王昇·왕승)을 집무실로 불렀다. “중공에 대응할 반(反)통전 공작이 중요하다. 지금부터 네가 책임져라.”

장제스 차남, 왕셩 고속 진급에 불만

일본 언론 대표단을 접견하는 시중쉰. 1982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일본 언론 대표단을 접견하는 시중쉰. 1982년 가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왕셩은 장징궈의 수제자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43년 전 장시(江西)성 벽촌에서 시작됐다. 1936년 12월, 국·공 합작으로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소련에 있던 장을 귀국시켰다. 장시에 발을 디딘 장은 농촌 청년들을 모아 학습반을 개설했다. 밭에서 땀 흘리던 소년과 목동, 화류계에 팔려가기 직전인 소녀, 전쟁 고아들이 학습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양장점에서 옷 수선하던 소년 왕셩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같은 밥 먹고, 같이 뛰고, 같은 방에서 자며, 지역에 만연하던 도박, 매춘, 아편에 철퇴를 가한 장징궈는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왕셩은 천성이 부지런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장의 눈에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이 무겁고 수완도 좋았다. 장이 비서 장야뤄(章亞若·장아약)와 눈이 맞았다.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장야뤄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후, 고아가 된 두 아들을 무사히 대만으로 데리고 나와 번듯이 키웠다.

1949년 대만으로 철수한 장제스는 젊은 간부들에게 활로를 열어줬다. ‘장징궈 시대’가 도래할 징조였다. 장의 지위가 상승할수록 왕셩도 따라 올라갔다. 국민당 중앙위원과 국방부 정치작전부 주임을 겸하며 육군 2급 상장으로 진급했다. 장제스의 차남 장웨이궈(蔣緯國·장위국)가 불만을 터뜨릴 정도의 파격이었다. “나는 10여 년간 중장 계급 달고도 상장 진급을 못 했다. 대만에 실전경험 없는 상장이 등장했다.” 부친과 형에게 호된 질책 받은 장웨이궈는 부친 사망 후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매달렸다. 쑹이 장징궈에게 부탁하는 바람에 2급 상장으로 진급했다.

대륙의 통전 공작에 대응하라는 장징궈의 명령에 왕셩은 긴장했다. 용기를 내서 재고를 청했다. 장의 뜻이 견고하자 꾀를 냈다. “모든 업무를 국민당 중앙 비서장 통해 주석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겠다.” 장은 국민당 주석을 겸하고 있었다. “둘이 알아서 하라”며 수락했다.

미·중 수교 후, 미국은 군부대 훈련과 3군 사관학교를 중공 고위당원들에게 개방했다. 1979년 여름, 아나폴리스 소재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한 미국주재 중국대사 차이쩌민(柴澤民). [사진 김명호]

미·중 수교 후, 미국은 군부대 훈련과 3군 사관학교를 중공 고위당원들에게 개방했다. 1979년 여름, 아나폴리스 소재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한 미국주재 중국대사 차이쩌민(柴澤民). [사진 김명호]

왕셩은 국민당 비서장 직속으로 ‘류샤오캉(劉少康)판공실’을 출범시켰다. 주임은 왕셩, 서기는 장징궈가 왕롄(王廉·왕렴)을 파견했다. 류샤오캉판공실은 대만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판공실 운영은 대·미 단교 초기 화교와 대만 국민이 주동적으로 헌납한 돈으로 운영했다. 액수가 엄청났다. ‘중화민국 단결자강협회’와 ‘삼민주의 대동맹’등 민간단체를 만들어 돈을 풀었다. 대만의 안정과 화교 사회 지지 확보가 목적이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대만독립 주장 세력과 좌경인사의 대만 방문도 추진했다. 후한 대접하고 고가의 선물 안겨주면 열에 아홉은 나가떨어졌다. 한번 회유당한 사람은 관리만 잘하면 다루기 쉬웠다. 유관기관의 협조는 기대 이상이었다. 권력기관인 경비총사령부와 당 조사국도 류샤오캉판공실의 요청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왕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참모총장과 국방부장도 ‘상장군(上將軍)’이라 부르며 먼저 경례를 했다. 대만 정계에 우스갯소리가 나돌았다. “보채는 애들 힘들게 달랠 필요 없다. 왕셩이 온다고 한마디 하면 뚝 그친다.” 장징궈의 후계자는 왕셩이라는 소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평화통일’을 주장한 대륙은 대만의 반응에 촉각을 세웠다. 화답은커녕, 류샤오캉판공실의 전략이 성과를 거두자 전열을 정비했다. 대만의 반통전 역량 와해에 나섰다. 전국의 대소기관에 대만연구소를 설치하고 간부 10만명을 배치했다. 반공의 상징이며 대만 정치작전의 대부 왕셩을 제거하기 위해 타왕소조(打王小組)를 조직했다. 소조 지휘관 시중쉰(習仲勳·습중훈)은 선전부장과 국무원 부총리, 중앙 정치국원을 역임한, 노련한 혁명가였다. 왕셩을 낙마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홍콩은 물론, 미국과 일본의 화교와 대만 유학생에게 손을 뻗쳤다. 미국과 중국은 밀월 초기였다. 웬만한 정보는 교환했다. 왕셩의 발언 내용과 동태를 미 국무부에 직접 전달했다.

중, 왕셩 언행 미 국무부에 직접 전달

1983년 초, 타이베이 주재 미국대만협회 회장 데이비드 딘이 왕셩에게 미국 방문을 요청했다. 미·중 수교 후 미국 정부가 대만의 현역 장성에게 보낸 최초의 호의였다. 딘은 왕의 오랜 친구였다. 1964년 2월, 대만주재 미국대사관 근무 시절 중공 내부상황 파악하기 위해 왕의 집무실 문턱을 자주 드나들었다. 월남전이 치열했을 때는 매주 한 번 미국대사관에서 회담하며 정보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보고를 받은 장징궈도 ‘정치적인 문제’라는 말을 반복하며 반대하지 않았다. 왕은 정치가가 길을 잡아주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빠지기 쉬운, 직진만 아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장이 반복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왕셩의 미국방문 배경은 복잡했다. 대·미 단교 후 장징궈는 미국과 단절을 바라지 않았다. 1949년 5월부터 30여 년간 계속된 계엄령의 해제와 민주화 요구를 제 손으로 풀고 싶었다. 미국이 물고 늘어지는 인권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대륙이 연합한 왕셩 제거 음모를 묵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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