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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대만으로 퇴각 후 비폭력 ‘정치작전’ 펼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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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4〉 

정치작전학교는 여성 생도들이 많았다. 반공 작가와 연예인, 운동선수도 많이 배출했다. 1960년대 말, 쌍십절 행사에 참석한 정치작전학교 생도들. [사진 김명호]

정치작전학교는 여성 생도들이 많았다. 반공 작가와 연예인, 운동선수도 많이 배출했다. 1960년대 말, 쌍십절 행사에 참석한 정치작전학교 생도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도서 대출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지식인들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묘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비민주적인 사람들이 진보와 민주를 외치며 목에 핏대 세우는 꼴이 보면 볼수록 가관이었다. 필요할 때 써먹고 내던지기에 딱 좋은 부류였다. 장정 도중 당권을 장악하자 지식인들과 연합전선(통전) 구축을 모색했다. 둘러대기 잘하고, 정적에게 잔인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중임을 맡겼다. 저우는 지식인이 우글거리는 학계와 언론계에 선전의 고수들을 침투시켰다. 암살, 테러, 매수, 미인계는 기본이고 미남계도 서슴지 않았다.

마오·저우, 지식인들 포섭에 열 올려

정치작전학교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는 매년 생도 교환 교육을 했다. 1974년 정치작전학교를 방문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생도들. [사진 김명호]

정치작전학교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는 매년 생도 교환 교육을 했다. 1974년 정치작전학교를 방문한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생도들. [사진 김명호]

효과가 있자 마오가 직접 나섰다. 불평분자와 경계가 모호한 민주인사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농민, 노동자, 중산층, 민족자본가와 함께한 연합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자칭 진보 인사와 삼류 언론인들이 뒤를 받쳐줬다. 국민당을 공격하고 정부를 모욕했다. 농민도 적절히 이용했다. 중국은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다. 농민이 국민의 80% 이상이었다. 중공은 토지개혁가를 자칭했다. 농기구가 무기로 변했다. 훗날 전국을 장악한 중공이 농촌을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칭 민주인사와 진보인사도 버림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만으로 퇴각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정치작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을 제안했다. “전쟁은 폭력 행위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 정치작전이다. 사상전(思想戰), 조직전, 심리전, 모략전, 정보전, 군중전 등 6가지 전쟁에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왕셩(王昇·왕승)은 장제스의 ‘정치작전 6원칙’을 구체화하기로 작심했다. 온갖 자료 수집하며 연구에 매달렸다. 1959년 5월, 왕셩이 펴낸 ‘정치작전개론’이 서점을 장식했다. 정치작전과 군사작전의 구별이 눈길을 끌었다. “군사작전은 전방과 후방이라는 일정한 공간이 있다. 정치작전은 공간의 제한이 없다. 군사작전은 동원과 전투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정치작전은 수시로 펴고 멈추는 것이 가능하다. 무력을 통한 군사작전은 전방의 전투인력과 후방의 생산자에게 일정한 연령과 성별을 요구한다. 정치작전 전사들은 남녀노소의 연령과 신체적 조건에 구애받을 이유가 없다.”

전성기의 왕셩(오른쪽)과 장징궈. [사진 김명호]

전성기의 왕셩(오른쪽)과 장징궈. [사진 김명호]

장제스가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지시했다. “왕셩과 함께 정치작전 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를 개설해라.” 타이베이 교외의 경마장 자리에 정치작전학교가 들어섰다. 문학, 영화, 미술, 체육에 관심 있는 청춘 남녀들의 지원이 줄을 이었다. 왕셩은 졸업생들을 각 부대와 정부기관에 배치했다. 정치작전학교 출신들은 소속 부대의 지휘관이나 기관장에게 보고할 의무가 없었다. 총정치부 주임을 겸한 왕셩에게 직보하면 왕은 장징궈에게 보고했다.

미·중 수교 후, 중공의 통전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한 ‘류샤오캉(劉少康)판공실’은 왕셩의 독무대였다. 국가안전국과 외교부, 행정원 신문국, 국민당 중앙 직속인 대륙공작회와 문화공작회, 사회공작회 정예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했다. 요소에 정치작전학교 출신들이 눈을 번득였다.

1950년대 CIA 대만지부장을 역임한 제임스 릴리가 타이베이에 나타났다. 장징궈를 설득했다. “민주화를 추진하는 것이 대만의 이익이다. 왕셩이 걸림돌이다.” 장이 동의하자 왕에게 미국 방문을 권했다. 미국 방문 기간 왕셩을 수행했던 국가안전국 주미특파원 왕시링(汪希苓·왕희령)이 구술을 남겼다. “왕셩의 미국 체류 비용은 초청자인 미국 대만협회가 부담하지 않았다. CIA가 준 현금을 내가 직접 지불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신용카드는 사용하지 않았다.”

미·대만·홍콩 매체 일제히 왕셩 극찬

왕셩의 미국 방문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판 함정이었다. 왕은 10일간 미국 정계와 학계의 중량급 인사를 두루 만났다. 국무차관보와 CIA 국장, 하원의원 솔라즈와 에드워드 케네디, 동북아 전문가 스칼라피노 등과 조심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미국인들은 장징궈의 건강상태와 후계자에 관심이 많았다. 왕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중화민국 헌법에 의하면 총통 유고 시 부총통이 계승한다.”

타임과 뉴스위크의 표지를 왕셩이 장식했다. 장징궈의 후계자라며 ‘류샤오캉판공실’을 거창하게 소개했다. 대만과 홍콩의 일간지와 잡지가 미국 양대 주간지의 기사를 전재했다. 중공 통일 선전부의 나팔수나 다름없는 홍콩의 언론매체가 왕셩 관련 기사로 도배했다. “대만에서 왕셩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다. 무한한 잠재력을 갖춘 군 실력자”라며 ‘류샤오캉판공실’의 전횡과 비행을 까발렸다. 귀국한 왕셩에게 장징궈가 한마디 했다. “류샤오캉판공실을 해체하고 당분간 쉬도록 해라.” 왕은 토를 달지 않았다. 그날로 판공실 문을 내렸다. 칩거 중인 왕을 행정원장이 불렀다. “국방부 연합훈련부 주임을 맡아라. 총통의 명령이다.”

왕셩의 보직 이동에 전 군이 떠들썩했다. 부대마다 환송연 준비에 분주했다. 왕은 엉뚱한 파장을 우려했다. 완곡히 거절하며 훈련부 밖을 나오지 않았다. 수십 년간 심혈을 기울인 정치작전학교의 송별연은 참석했다. 생도와 교관들이 30년 전 왕이 작사한 교가를 열창하며 흐느끼자 감정을 자제하지 못했다. 연설 말미에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저들은 오늘 왕셩 한 사람의 숨통에 비수를 꽂았지만, 내가 배출한 천천만만(千千萬萬)의 왕셩은 건재하다.” 내빈석상에 왕의 몰락을 주도한 사람이 많았다.

참모총장이 왕의 연설을 녹음했다. 장징궈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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