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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39→84, 러 루블화 손실 싹 회복…국제제재 그래도 효과?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 루블 동전과 미국 달러 지폐. 연합뉴스

러시아 루블 동전과 미국 달러 지폐. 연합뉴스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자, 서방의 대(對)러 경제 제재가 실효성 없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인위적 조치로 루블화의 가치를 떠받치고 있을 뿐, 러시아의 실제 재정 상태는 위태롭다”고 분석했다.

4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뉴욕타임스(NYT), 미국 온라인 경제 전문매체 쿼츠 등에 따르면, 루블화는 지난달 7일 저점을 기록한 뒤 극적인 회복세를 보이며,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의 가치로 돌아갔다. 비즈니스스탠다드는 루블화가 지난달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낸 통화(best-performing currency)’였다고 전했다.

현재 루블화는 달러당 84루블(5일 종가 기준)로,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지난 2월 21일 달러당 80.42루블에 거래되던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달 7일 달러당 139루블로, 40% 이상 가치가 폭락했지만 이후 ‘날카롭고 지속적인’ 회복세를 보이며 거의 모든 손실을 회복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NYT 칼럼에서 “러시아의 경제관리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이끌고 있는) 장군들보다는 유능한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달러당 루블화 환율.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달러당 루블화 환율.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러, '극단적 방어'로 루블화 반등시켜

크루그먼의 지적대로, 루블화의 반등은 자유로운 거래와 수요·공급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러시아 경제 관리들의 극단적 방어조치로 만들어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2월 28일 금리를 20% 인상했다. 루블을 달러나 유로로 바꾸는 대신, 루블로 저축하게 만들어 하향 압력을 줄였다. 러시아 정부는 자국 기업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80%를 루블로 변환하라고 요구함으로써 루블화에 대한 상당한 수요를 창출했다. 또 외국인이 소유한 증권의 매각을 금지하고 러시아인의 해외 송금과 외환대출을 제한했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서방 국가를 상대로 천연가스 구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고 통보했다. 해당 국가가 가스 대금을 치르기 위해 루블화를 구매하면 통화의 시장 가치가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인 애틀란틱카운슬의 찰스 리치필드 부국장은 “러시아의 ‘가스 대금 루블화 결제’ 정책이 루블화에 대한 전망을 바꿔 반등의 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서 사람들이 환전소 앞을 지나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서 사람들이 환전소 앞을 지나고 있다. [AP=연합뉴스]

"장기적으로 추락 막기 어려울 것"

하지만 이같은 반등세가 지속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러시아 중앙은행 초대 부총재였던 세르게이 알렉사셴코는 “러시아는 루블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외환시장을 폐쇄했지만, 영원히 루블화를 시장 논리에서 떼놓을 수는 없다”면서 “서방의 제재로 이미 러시아의 물가가 치솟기 시작됐고, 제조업체의 핵심부품 부족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 라보뱅크의 통화전문가 제인 폴리는 “러시아가 외화로 표시된 부채 상환에 직면함에 따라 통화는 다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외국 기업의 자산 매각과 현금 인출이 시작되면 루블화의 가치 추락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동맹국과 함께 러시아 제재의 허점은 막고, 새로운 제재는 계속 추가하는 중”이라면서 “조만간 러시아가 인위적으로 떠받치고 있던 루블화의 가치에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루블화 반등이 러시아 경제에는 사실상 악재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방은 루블화 가치 상승을 근거로 대러 제재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팻 투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제재가 러시아 경제를 실질적으로 마비시키지 못했다는 증거”라며 “러시아 석유와 가스 판매를 전 세계적으로 차단해 러시아의 수입원을 원천봉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

"루블화 집착, 경제정책 판단 장애 신호" 

영국 캐피털이코노믹스의 윌리엄 잭슨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루블화 가치는 러시아 경제 건전성을 대표하는 지표가 아니다”면서 “루블화와 상관없이 이미 러시아의 재정 상태는 극도로 타이트해졌다”고 말했다. 세르게이 구리에프 프랑스 시앙스포대학 경제학 교수는 “러시아는 루블화를 반등시켜 경제를 회복하려는 게 아니라, 서방의 제재가 무력하다 ‘선전 효과’를 거두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은행 스베르방크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 국영은행 스베르방크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폴 크루그먼 교수는 “러시아의 루블화 방어는 인상적이지만, 푸틴 정권의 경제 정책이 잘 돌아간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푸틴의 군사 고문들이 두려움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황을 정확히 보고하지 못했듯, 그의 경제 고문들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며 “(루블화에 대한 집착은) 러시아의 경제 분야에서도 정책 판단에 장애가 왔다는 새로운 신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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