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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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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검찰이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에 속도를 내며 압수수색에 나섰다는 기사가 지난주 신문에 실렸다. 수사 자체야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시점이 묘하다. 3년간 진척이 없던 수사가 하필이면 대선 직후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1면 헤드라인보다 이런 소소한 뉴스들로부터 정권 교체를 실감한다. 몇몇 지인의 식사 자리에서 “그러길래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이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해 좌중을 웃긴 이는 검찰 간부 출신이었다.
서욱 국방장관이 북한의 김여정으로부터 말폭탄 세례를 받았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징후가 명확할 경우 발사 원점과 지휘ㆍ지원 시설을 정밀 타격할 수 있는 능력과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한 발언을 맹비난한 것이다. 국방장관으로서 응당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이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 움직임이 날로 분명해지고 있는데 아무런 사전 경고를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직무 유기에 가깝다. 국방장관에게 쏟아지는 북한의 말폭탄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칭찬과 같다. 그런데 대선 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역대 국방장관들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서 장관의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 시절 했던 선제타격 발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한번 정권 교체를 실감한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검찰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수사 속도를 조절하고, 국방부가 대북 유화 자세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은 지체 없이 바로잡아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신임 국무총리로 한덕수 전 총리를 지명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신임 국무총리로 한덕수 전 총리를 지명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능력과 리더십 못지않게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소신이다. 임명권자의 국정철학에 맞춰 정책을 수행하는 게 장관의 직분이지만, 그 속에서도 흔들리면 안 되는 원칙이 있고 지켜야 할 규범이 있다. 불법 혐의가 발견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체 없이 수사한다거나, 남북대화와 별개로 안보 태세는 굳건히 한다는 것 등이 원칙에 속한다.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의 정지나 계획 중인 원전 건설 중지는 정해진 절차, 즉 규범에 따랐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가 본 공직자들은 원칙과 규범보다 대통령의 의중을 더 상위에 두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을 자처했다.

책임장관제 성공 위한 전제 조건은 #소신과 책임감 갖춘 장관 뽑는 것 #바람보다 먼저 일어설 줄 알아야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 ‘풀’이 영혼 없는 공직자에 대한 패러디로 인용되는 건 비극이다. 김수영이 관찰한 ‘풀’은 모진 시련을 뚫고 일어서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시인의 창작 의도는 불분명하지만 억압을 이겨내는 민중의 의지를 노래한 저항시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패러디로서의 ‘풀’은 바람의 방향을 탐지하는 촉수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존재로 읽힌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만 남고 바로 뒷구절의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은 사라져 버렸다. 시인이 다시 깨어나 자신의 대표작이 이렇게 인용되는 것을 보면 뭐라고 한탄할까.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한덕수 총리 후보자가 장관에게 차관 인사 추천권을 주는 등 책임장관제에 의지를 보인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역대 어느 정부건 청와대가 일선 부처의 국장급 인사까지 직접 챙긴 사례들이 비일비재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말 그대로 미관(微官)인 청와대 행정관이 육군 참모총장을 외부로 불러낸 일까지 있었다. 책임장관제는 이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차관 뿐 아니라 산하 기관장에게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의 실험이 성공해 관행으로 정착되고 법제화로 이어진다면 분권(分權)화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책임장관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관에게 실질적인 차관 인사 권한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제대로 된 장관, 다시 말해 소신 있게 일하고 결과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발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신과 책임감 없는 장관에게 권한만 주는 건 그렇게 아니함만 못하다. 윤석열 정부의 첫 내각 인선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장관이 아니라 먼저 일어설 줄 아는 장관을 국민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