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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이해관계 없는 자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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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지난해에 누군가로부터 11억원을 빌렸다고 신고했다. 공직자 재산신고 내역에 적었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퇴임 후에 기거할 사저 마련을 위해 돈을 빌려 썼고, 이자를 지급했으며, 현재는 채무를 모두 상환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언제, 누구에게 빌려서 언제, 어떻게 갚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포괄적 영향력 가진 대통령에게 #순수한 11억원 대여가 가능할까 #이해 무관은 한쪽의 생각일 수도

청와대 소통수석은 돈을 빌려준 이에 대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 않은(이자마저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통령 부부와의 돈거래가 아무런 경제적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을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에 기거할 경남 양산의 집. 송봉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에 기거할 경남 양산의 집. 송봉근 기자

상상해 봤다. 이 나라 최고 권력자 또는 그의 가족에게 서울 부심권 집 한 채 값을 담보도 잡지 않고 빌려줬는데도 그 일로 경제·사회생활에 아무런 영향이 없을 이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사업을 하는 사람, 본인 또는 가족이 공무원인 사람은 이해관계가 없다고 보기가 어렵고, 공기업이나 민간 기업에 있어도 고위직이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이른다. 결국 남는 후보군은 ‘나는 자연인이다’ 수준으로 세상과 담쌓고 사는 은둔형 자산가, 한국 대통령 영향권 밖에서 사는 해외 거주자 정도다.

청와대 측은 사업을 하는 사람 또는 가족·인척 중에 공직자가 있는 사람도 대통령 부부가 돈을 빌린 것과 관련해 어떤 혜택도 주지 않았으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통수석 말을 곱씹어 보면 그런 뉘앙스가 느껴진다.

대통령 권력은 매우 포괄적이고 책임도 포괄적이다.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재판, 탄핵심판의 판결문과 결정문에 늘 이 명제가 적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업 총수에게 문화·스포츠에 대한 지원을 당부한 말 때문에 기소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기업에서 직접 돈을 받은 적은 없다는 게 조사 결과다. 돈은 최서원(최순실)씨가 설립에 관여한 재단이나 회사로 갔다. 법원은 경영권 승계, 면세점 확보, 경쟁 기업 인수 등 대통령의 권한이 미칠 현안이 기업들에 있었기에 그 돈을 뇌물로 판단했다. 박 전 대통령이 면세점 문제나 기업 인수 문제에 직접 개입해 기업과 최씨에게 이득을 제공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었다. 11억원 사안을 박 전 대통령 문제에 직접 비유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크고 막강해서 이해관계의 폭도 매우 넓으며, 대통령의 행동이 언제 어떤 형태로 이해관계를 형성할지 모른다는 말을 하고자 할 뿐이다.

11억원을 제공한 이가 문 대통령 부부가 급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알기는 어렵다. 대통령 부부 또는 그 주변의 인사가 말을 해 알게 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재산이 제법 있다고 알려진 어떤 사람이 대통령 가족이 쓸 돈에 대한 제의 내지 부탁을 받았을 경우 과연 외면할 수 있었을까. 임기가 꽤 남은 현직 대통령의 일이고, 그 돈을 빌려줄 때만 해도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있었다. 설사 구설에 오를 것이 걱정됐다고 해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장 현금 11억원이 없다면 뭔가를 팔아서라도 대는 게 상식적이다. 상대가 내 부탁을 자유롭게 거절할 수 없는 관계에서의 부탁과 수락, 순수하게 호의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한쪽 편의 생각일 수 있다.

문 대통령의 집, 김정숙 여사의 옷값 문제 얘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이들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논두렁 시계’ 시즌2냐고 소리를 높인다. 그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버렸느냐가 아니라 한쪽은 이해관계가 없다고 믿었으나 다른 한쪽의 생각은 달랐던 고가 시계 선물과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노 전 대통령의 자괴감이다. 기자들은 스스로 좀스럽고 민망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권력의 투명함을 위해 통치자의 돈 문제를 보지 않을 수 없다. 13년 전인 2009년 4월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를 닫으며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한다”고 했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의 비극을 언론에 대한 재갈로 삼는 것도 버릴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