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행 편도만 끊었다"...알랭 들롱도 결심한 '마지막 파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품위 있는 죽음’ 택한 사람들

스위스 바젤의 조력사 장소 내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조명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사진 신아연]

스위스 바젤의 조력사 장소 내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조명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사진 신아연]

세기의 미남으로 알려진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87)이 ‘조력사’를 결심했다.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그는 가족과 상의해 상태가 더 악화하면 스위스에서 죽음을 맞기로 결정했다. 스위스에서는 1942년부터 약물 처방 등 의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 본인이 직접 약물을 주입·복용해 목숨을 끊는 조력사가 합법이다. 이는 영양공급 등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나 임종에 가까운 중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약물을 주입해 사망하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와는 구분된다.

지난해 8월 호주 국적의 한국 동포 고(故) 박민철(64·가명)씨도 같은 결심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위스의 조력사 단체 ‘페가소스’의 도움을 받았다. 스위스에서는 조력사가 합법인 만큼, 조력사를 돕는 단체도 여럿이다. 그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조력사 단체는 1998년에 설립된 ‘디그니타스’다. 디그니타스는 전 세계 92개국 1만1024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비영리 단체로 자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조력사도 지원한다. 지난해에는 212명이 이 단체의 도움으로 생을 마쳤다. 1998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 사망자는 3460명에 달한다. 여기에 박씨처럼 다른 단체의 도움을 받은 사례까지 합하면 스위스에서 조력사로 사망한 외국인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왜 스위스에서의 죽음을 결정했을까. 20년간 호주에서 살았지만, 한 줌의 재가 되어 수목장으로 한국에 묻힌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신아연(59) 작가(저서 『강치의 바다』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등)를 통해 그 연유를 들어봤다.

“지난해 3월 고인께서는 저의 오랜 독자였다고 하시면서 스위스행을 제안하셨습니다. 간곡히 부탁하셨고 저 역시 타인의 부탁을 되도록 들어주려고 하는 편이라 동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분은 호주에서 편도티켓을, 저는 한국에서 왕복티켓을 끊고 스위스로 출발했지요.” 그렇게 일면식도 없던 박씨와 신 작가는 지난해 8월 24일 스위스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박씨는 폐암 말기로 병원에서 선고했던 시한부를 3개월 이상 넘긴 상황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당시 굉장히 정정했다고 한다.

국내선 2018년부터 ‘존엄사’ 합법화돼

“놀랄 만큼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지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충격이었지요. 곧 가실 것처럼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죽음 앞에 의연한 그분을 만류할 수는 없었습니다. 평소 ‘통증을 느끼면서 가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대로 그분은 그걸 원했던 거죠. 마지막 파티를 하듯 생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실제 박씨는 스위스에 도착한 첫날밤 호텔에서 지인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인생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 작가의 표현으로는 마치 소크라테스가 마지막 독배를 마시기 전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둘째 날엔 의사들과 면담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후 ‘저승사자(의사)가 다녀갔네’라고 농담을 하실 정도로 여유가 많으셨어요. 그날 최종 사인을 하시곤 가족 및 지인들과 개별 만남의 시간을 가지셨어요. 제게는 타인을 위한 글을 쓰라고 하시며 ‘인연이 되어 신 작가를 통해 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고맙겠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출간을 계획하고 있는 이유지요.” 신 작가는 현재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스위스 동행 일정을 담은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날 밤 고인은 마지막 날을 술에 취해 보내고 싶지 않다며 식사도 하지 않고 밤을 새워 세상과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포근한 날씨였던 마지막 날 박씨는 오전 10시에 가족 및 지인에게 선물을 전달하며 작별을 고했다. 고인이 1년 넘게 설득한 유가족들은 담담하게 고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조력사 장소로 이동해 본인 확인 등의 절차를 거치고 필연적으로 찾아온 마지막 순간. “그분은 ‘이건 내시경 검사 때 마취제 맞는 거랑 똑같은데 내시경 검사 후에는 깨어나서 집에 가지만 이건 못 깨어나는 그 차이야’라는 농담을 하셨지요. 의료진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주저 없이 약물이 주입되는 밸브를 돌리셨어요. 그리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운명하셨습니다.” 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여유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조력사를 진행하는 건물의 외부. [사진 신아연]

조력사를 진행하는 건물의 외부. [사진 신아연]

“어떤 죽음이 올바른 죽음이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준비된 자만이 조력사를 택할 수 있고, 그 준비란 늘 깨어살면서, 삶과 죽음을 깊게 성찰해 온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분의 마지막을 통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신 작가의 말이다.

중앙SUNDAY의 취재 결과 지금까지 대표적인 스위스 조력사 단체 디그니타스의 도움으로 사망한 한국인은 총 3명이다. 2019년 국내에 알려진 두 명의 사례 이후 지난해에도 한국인 한 명이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디그니타스에 가입해 향후 조력사를 희망하는 한국인은 104명.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을 앓고 있는 김경태(42)씨도 그중 한 명이다. 통증은 2013년 자전거 사고 이후 시작됐다. 불현듯 왼쪽 팔이 불에 타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온다.

“뚜렷한 치료법도 없고, 부작용이 있는 마약성 진통제를 써도 통증이 완벽히 통제가 안 되고, 병원비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죠. 또 과연 내가 우리 사회 구성원인 게 좋을까라는 고민도 많았어요. 불가피하게 지원을 계속 받아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결국 여러 절차를 거쳐 디그니타스에 가입했습니다.” 김씨는 가입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체적 통증과 더불어 사회적 입지에 대한 고민이 계기가 된 셈이다. 그는 지난 2월에 스위스로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와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3년 정도 시기를 늦췄다. 김씨는 “준비하고 있는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앞선 사례들을 비롯해 조력사,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극심한 신체적 고통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스위스 조력사 단체에서도 회원을 받을 때 이들의 병력과 자신이 직접 결정한 것인지를 위주로 판단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안락사나 조력사만이 해답일까.

65세 이상 노인 85.6% 연명의료 반대

고인의 선물. 고인은 조력사 2시간 전에 신아연 작가와 지인들에게 스위스 시계를 선물했다. [사진 신아연]

고인의 선물. 고인은 조력사 2시간 전에 신아연 작가와 지인들에게 스위스 시계를 선물했다. [사진 신아연]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2월부터 ‘존엄사’가 합법화됐다. 회생 가능성이 없고 임종이 임박한 경우 가족 간 합의 또는 미리 써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지난 2월까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21만953명이고, 연명 의료를 중단 혹은 유보한 사례도 20만건이 넘는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불필요한 치료를 중단하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셈이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 9930명을 대상으로 연명 의료에 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 85.6%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신체적·정신적 고통 없는 임종이 중요하다’고 답한 노인도 90.5%다.

분명한 건 웰다잉을 요구하는 뜨거운 여론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죽음에 대한 논의가 더뎠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미래에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어떤 죽음이 말 그대로 ‘웰다잉’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사망자의 77.1%는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전문가들은 공통으로 우리 사회가 웰다잉에 대해 함께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임종에 이르러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은 사실상 존엄사라고 보기 힘들다”며 “존엄사조차 제대로 이뤄지기 힘든 상황에서 안락사·조력사를 논의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그는 “임종 전에 미리 죽음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연명치료를 중단하면 상당한 의료비가 절감되는데 그런 비용을 활용해 경제적 요인이 간병 살인, 동반 자살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개인 부담을 완화하고, 생전에 장례식을 열어 작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해 너무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 전반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지금 호스피스나 통증 완화치료도 모든 대상자가 받는 게 아닌 상황에서 갑자기 안락사나 조력사를 도입할 경우 너무 급속도로 그 방안만 정답인 것처럼 치우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에 대한 고민이 선행됐다는 전제하에 자유민주주의인 사회인만큼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선택지를 드리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