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소통의 리더십, 결단의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서울 종로구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서울 종로구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연세 지긋한 전직 고위 관료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난다. 1950년대 서울 효자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그분은 경무대 담장 너머로 이승만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을 가끔씩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다가가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손을 흔들어주던 기억도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무렵 시민들이 대통령의 모습을 육안으로 보는 건 지금처럼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청와대가 범인(凡人)의 접근을 불허하는 구중궁궐처럼 된 것은 무장공비가 코앞까지 침투한 1968년 1·21 사태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윤석열 당선인의 말은 틀림이 없다. 고시생들이 공부할 공간이 없어 생활여건이 열악한 고시원에 들어가는 건 아닐 것이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성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나 공간은 소통의 필요조건 중 하나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동네 개구쟁이들도 대통령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과 국민 간의 소통이 잘 이뤄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人)의 장막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던 그 시절이야말로 완벽한 불통의 시대였다. 머잖아 새 이름이 붙을 대통령의 거처나 집무공간의 담장을 낮추고 근처를 공원으로 개방한다고 해서 소통이 저절로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윤석열 당선인은 언론과의 소통을 중시한다. 엊그제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발표하면서 사전 원고 없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브리핑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까칠한 질문이 적지 않게 나온 기자들과의 일문일답도 피하지 않았다. 약속대로 대통령 집무실과 같은 건물 1층에 기자실을 두면 대통령 및 참모들과 기자들 간의 접촉 기회가 자연스레 많아질 것이다. 출퇴근길 대통령이 잠시 카메라 앞에 서서 출입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을 이제는 백악관 외신 화면이 아닌 용산발 국내 뉴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은 훨씬 더 투명해 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보안손님’이 청와대에 드나들 여지는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다.
 이처럼 언론은 중요한 소통 채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역시 소통의 한 부분일 뿐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한 번에 대여섯 시간을 훌쩍 넘어간다. 써준 원고를 보고 읽는 것도 아닌데 막힘 없이 답변한다. 그런데도 푸틴 대통령을 소통의 달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언론 앞에 서는 것은 주로 말을 하기 위해서다. 기자들의 질문을 통해 국민들의 관심사와 여론의 우려가 무엇인지 유추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소통은 쌍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나의 말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 특히 반대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역대 정부의 사례들로 볼 때 소통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후자 쪽에 있다. 우리 편끼리 대화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은 반쪽짜리 소통에 불과하다. 사람의 혀는 하나지만 귀는 둘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되지만 두 귀 중 하나는 반대편을 향해 열어두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윤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 결정엔 아쉬움이 있다. 이전 결정의 명분으로 소통을 내세웠지만 결정 과정에서 얼마나 소통의 노력을 보였는지는 의문이다.
 당선인의 말처럼 결단하지 않으면 영원히 해내지 못할 일이 세상에는 많다. 그렇다 해도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결정 발표 이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국민은 더 큰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직무는 소통과 결단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둘 다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소통의 리더십과 결단의 리더십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을 조화롭게 발휘할 때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집무실 담장 높이보다 중요한 건 #반대 의견 경청하는 진정한 소통 #소통과 결단력 둘 다 갖춰야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