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산업은행 핀셋 이전, 그 희망 고문

중앙일보

입력 2022.03.2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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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부디렉터 兼 증권부장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공약을 내세운 가운에 이의 추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 공약을 내세운 가운에 이의 추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모습.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남태평양 원주민들이 이상한 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활주로 같은 길을 닦고 관제탑을 닮은 오두막을 만든 뒤, 야자 열매 헬멧을 쓰고 나무 막대기 소총을 든 채 길을 따라 순찰하는 것이다. 밤이면 활주로에 불을 밝히고 24시간 하늘만 바라보며 뭔가 떨어지길 애타게 기다렸다.

 원주민의 이상 행동은 학습 효과다. 2차대전 당시 남태평양 일대의 섬에 보급기지를 만든 미군이 활주로를 닦자 난생처음 보는 비행기가 나타나 물자를 쏟아내고 사라졌다. 전쟁이 끝나고 보급이 끊기자, 활주로가 비행기를 부르는 열쇠라고 여긴 원주민들이 나름의 숭배 의식에 나선 셈이다. 경제학 등에서 말하는 ‘카고 컬트(Cargo Cult·화물 숭배)’다.

 카고 컬트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이해한 채 원하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을 뜻한다. 전후 관계와 인과 관계를 혼동하면서 생기는 판단의 오류다. 허허벌판에 건물 몇 채를 지어 공업단지를 조성하면 기업이 내려올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하는 것이 카고 컬트의 대표적인 예다.

 남태평양 원주민의 이상 숭배가 떠오른 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불을 지핀 산업은행(산은) 부산 이전 논란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지난 1월 부산을 방문해 산은 부산 이전 공약을 내걸었다. 이전에 따른 기회비용 등에 대한 진지한 검토 없이 금융 도시 부산을 위해 이 공약을 적극적으로 이행할 태세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추진하면서 부산은 금융 중심지로 선정됐다. 그 결과 한국거래소와 한국예탁결제원,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29개 금융기관을 유치했다. 하지만 금융 도시 부산의 성적표는 기대만큼 괜찮지 않다.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 따르면 부산의 순위는 2015년 3월 27위에서 지난해 9월 33위로 하락했다.

윤 당선인의 산은 부산 이전 공약
금융 도시 경쟁력 강화는 미지수
투자자 패싱, 국민연금 재판될 수도

 어쩌면 이런 성적표는 당연하다. 공공기관 몇 곳을 옮긴다고 금융 허브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희망 고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돈이 오가는 금융 시장에서 집적 효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물적·인적 네트워크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전 세계 100대 은행의 절반가량이 수도에, 31% 정도가 미국 뉴욕과 같은 경제금융 중심지에 본점을 둔 이유다.

 외국계 투자회사와 은행, 증권·보험 등 국내 금융사의 상당수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다. 각종 제도와 현안을 조율해야 하는 국회와 금융 당국도 서울에 있다. 금융기관과 금융회사의 중요한 상대인 기업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상장사 2485개 중 72.3%의 본사가 수도권에 자리 잡고 있다. 은행 하나 옮겨간다고 금융 중심지가 되는 마법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산은의 ‘핀셋 이전’이 금융 도시 부산의 경쟁력을 얼마나 강화할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건 어쩔 수 없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갈 수많은 업무를 위해 직원들은 KTX와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될 것이다. 업무 비효율성과 비용 부담, 경쟁력 약화 우려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산은이 ‘제2의 국민연금’이 될 우려가 크다. 전북 전주로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내려간 뒤 국민연금은 운용역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기금 규모로는 세계 3대 큰손이 됐지만, 해외 투자자들의 ‘국민연금 패싱’ 논란까지 빚어졌다. 금융 시장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탓이다.

“각국 정부는 특정 장소들을 선호해서는 안 된다. 도시가 자신만의 경쟁 우위를 찾아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지난 1월 기자간담회에서 부산 이전 논란에 대한 질문에 이동걸 산은 회장이 언급한 책,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가 쓴 『도시의 승리』에서 눈길을 끈 부분이다. 도시의 경쟁 우위에 대한 고민 없이 특정 지역에 대한 선호로 산은의 핀셋 이전이 이뤄진다면 그저 부산의 금융기관 소장 목록 늘리기에 그칠 뿐이다.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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