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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에 후회한다 어쩐다 말라" 이용수 할머니, 文에 분노 왜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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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ICJ 회부 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각국 위안부 생존자 및 단체의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공개서한 발송 발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ICJ 회부 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각국 위안부 생존자 및 단체의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공개서한 발송 발표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문 정부의 위안부 문제 5년

17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손글씨 메모가 적힌 종이를 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한‧일 합의를 인정했는지 그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한‧일 합의’는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이뤄진 12‧28 위안부 합의를 뜻한다. 이 할머니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피해자 중심주의’에 어긋나는 중대한 흠결이 있는 합의라고 규정해놓고, 이제 와서는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며 이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은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위안부 합의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이 딱히 뒤집힌 것은 아니다. 2018년 1월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은 “2015년 합의가 양국 간의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를 감안해 우리 정부는 동 합의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대해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위안부 합의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지금의 입장과 다르지는 않다.

말로는 “인정”, 행동은 폐기 수순

그런데도 이 할머니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문 정부가 입장을 바꿨다고 생각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를 두고 정부가 보여 온 자아분열에 가까운 태도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7일 기자회견 중 직접 적은 입장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17일 기자회견 중 직접 적은 입장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 합의 검증 TF 결과 발표 직후 문 대통령은 직접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곧이어 정부는 합의의 핵심인 화해‧치유 재단을 해체해버렸다. 말로는 공식 합의로 인정한다면서도 행동은 합의 무효화를 향해 갔다.

특히 일본이 피해자 지원을 위해 화해‧치유재단에 거출했던 10억 엔 처리는 코미디에 가까웠다. 10억 엔을 돌려주는 순간 합의 파기가 되기에 차마 일본에 반환하지는 못하는데, 이걸 그대로 갖고 있으면 합의의 완결성을 유지한다는 뜻이 되기에 그건 또 싫은 모순적 상황.

그래서 낸 꼼수가 10억 엔을 정부의 예산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이 돈에 어울리지도 않는 ‘양성평등기금’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금까지도 그냥 가만히 들고만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오태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검토 TF 위원장(오른쪽)이 지난 2017년 12월 27일 TF 검토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브리핑실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오태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 검토 TF 위원장(오른쪽)이 지난 2017년 12월 27일 TF 검토 결과를 발표하기 위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브리핑실로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위안부 합의 파기는 외교적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대통령이 나서 흠결이 명백하다고 펄펄 뛰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고. 그래서 결국 내린 결론이 12‧28 합의에 흠집을 있는 대로 내서 회복 불가로 만들어놓되, 마지막 숨통은 끊지 않는 이런 애매한 상태였다.

이 할머니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위안부 합의는 폐기 수순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급격히 달라진 ‘대통령의 말’

그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한‧미‧일 협력 필요성이 커지고, 지난해 도쿄 여름 올림픽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하는 카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문 정부는 다 죽어가던 위안부 합의 심폐소생에 나섰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가 됐어도 어쨌든 숨통이 붙어 있는 상태로 일본 앞에 위안부 합의를 가져가야, 일본이 김정은 방일을 위해 협력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월 법원이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뒤 문 대통령이 “솔직히 조금 곤혹스럽다”(지난해 1월 18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합의에 거침없이 칼을 대던 2017년의 기세라면 두 손 들어 환영해야 마땅한 판결이었는데 말이다.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현안마저도 국내정치적으로 반일감정 몰이에 이용하더니, 결국 한계가 드러났다는 비판이 제기된 이유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뉴스1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소녀상.뉴스1

이처럼 문 정부가 다중 인격적 행태를 보이는 사이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위안부 피해자들이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해부터 위안부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ICJ) 및 고문방지위원회(CAT) 회부를 촉구하고 나선 건 말 그대로 ‘참다 못해서’였다.

피해자 ‘국제 절차’ 요청도 뭉개기

하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입장을 정하기 어려운 문제라 그냥 뭉갠 것이나 다름없었다. 17일 기자회견도 위안부 문제가 ICJ나 CAT에 회부될 수 있도록 유엔 차원에서 한국 정부가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호소문을 발송하며 연 것으로, 한국 뿐 아니라 외국의 피해자 및 피해자 지원 단체들도 참여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책임감 없는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며 “책임 있는 정부 관계자들이 겨우 하는 말이 ‘할머니, 건강하세요’다”라며 “그런 말 듣기싫다. 해결책을 가져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문 대통령을 향해 “나중에 회고록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니 어쩌니 그런 소리 마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문 정부 5년 동안 해당 사안을 취재해온 입장에서, 후회할 자격도 없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매서운 지적에 백분 공감한다. 정부는 ‘미래지향적 관계’라는 표현을 관성적으로 쓰지만, 사실 이 땅에 피해자들만큼 과거를 매듭짓고 미래를 향해 나가고 싶은 이들은 없다.

하지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문 정부가 이런 매듭을 짓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청와대에서 연합뉴스 및 세계 7대 통신사와 서면인터뷰를 한 후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청와대에서 연합뉴스 및 세계 7대 통신사와 서면인터뷰를 한 후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임기 동안 종종 중요한 당면 현안에 대해 남 이야기하듯 하는 화법으로 듣는 이들의 의아함을 자아내곤 했다. 지난달 각국 통신사들과 한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위안부 문제가 진척을 보지 못한 이유를 묻자 문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한‧일 간에 풀어야 할 현안들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 접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게 여긴다.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법이 돼야 한다. 진정한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역사 앞에 진정성 있는 자세와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당연한 말씀 감사하다. 나중에 회고록에도 꼭 이렇게 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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