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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물가·긴축…대선 후 韓 경제 ‘시계 제로’

중앙일보

입력

9일 대통령 선거 이후 새 경제팀이 꾸려지게 됐지만 앞에 놓인 길은 ‘시계 제로(0)’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기름값을 필두로 한 물가 급등, 초읽기에 들어간 미국 기준금리 인상. 한 치 앞을 제대로 예상하기 힘든 복합 위기에 맞닥뜨려서다. 새 정부가 전방위로 밀려오는 ‘S(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를 막아내기엔 쉽지 않다란 평가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수출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쌓여있는 모습. 뉴스1

지난해 11월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수출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쌓여있는 모습. 뉴스1

“국ㆍ내외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8일 이억원 기획재정부 제1차관, 재경관 영상회의), “대외 여건에 대한 우려로 경기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됐다.”(7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동향). 이처럼 한국 경제가 직면한 현 상황을 두고 정부와 연구기관의 진단은 ‘불확실성’ 한 단어로 모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산 석유ㆍ가스ㆍ석탄 수입을 금지하는 독자 제재 방침을 발표한 8일(현지시간) 국제유가는 다시 솟구쳤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사이트 ‘오피넷’에 따르면 이날 영국산 브렌트유는 배럴당 127.98달러로 2008년 7월 이후 최고 기록(종가 기준)을 경신했다.

러시아 사태로 치솟는 유가.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러시아 사태로 치솟는 유가.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해외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예전에 없던 가장 강력한 에너지 공급 충격”이 닥칠 거라며 올해 평균 유가 전망을 브렌트유 기준 135달러로 높여 잡았다. 바클레이스와 에너지 전문 조사업체 리스타드 에너지는 최악의 경우 유가가 200달러로 치솟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불과 1년 전과 비교해 국제유가가 서너 배 오른다는 건데 1970~80년대 오일쇼크(석유파동) 이후 유례가 없다.

유가가 130달러 위로 올라선다면 한국 소비자물가 상승률 4%(전년 대비) 돌파는 예정된 수순이다. 석유류는 물론 니켈ㆍ코발트ㆍ구리 같은 광물, 밀ㆍ옥수수 등 곡물 가격까지 급등하고 있어서다. 이런 공급 위기는 대선 직후인 이달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물가에 반영될 전망이다. 오피넷을 보면 이날 전국 휘발유 소매가격은 L당 평균 1892.4원으로 1900원 돌파를 눈 앞에 뒀다. 8년 만에 최고치로 이미 위기 수준이다.

달러당 1230원대로 올라선 환율은 물가 상승을 더 부추길 요인이다. 전망은 암울하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러시아 디폴트(채무 이행 불가) 선언 가능성과 그 파장, 유가 급등에 따른 한국 무역 적자 전환 가능성 등 추가로 반영해야 할 요소들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정규철 KDI 경제전망실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유동성을 푼 데다 우크라 사태 등 대외적 요인까지 겹치면서 물가가 치솟고 있다”라며 “물가는 새 정부 지지율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중요한 과제”라고 평가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소비자물가 상승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지난달 20.6% 증가(전년 대비)하며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던 수출도 암초를 만났다. 지난달 8억4000만 달러 흑자 전환에 성공했던 무역수지(수출-수입)도 수입 물가 급등세로 인해 다시 적자로 돌아설 수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 사태로 인한 경기 불안이 빠른 시간 내 해소되지 않는다면 정부가 공언한 올해 3% 경제 성장률 달성도 힘들다.

앞서 지난 2일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이달 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지지할 것”이라며 사전에 계획한 금리 인상 수순을 밟아나가겠다고 못 박았다. 미국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한 긴축 시계는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한국도 금리 인상 압박이 크다.

지난해 말 기준 1862조1000억원으로 불어난 가계빚(가계신용)이 금리 인상 위험 앞에 놓여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올 1월 가계대출 가운데 76.2%(잔액 기준)는 변동금리 대출이다. 기업 대출도 67.7%가 변동금리 조건이다.

9일 서울 한 주유소에 게시된 유가. 연합뉴스

9일 서울 한 주유소에 게시된 유가. 연합뉴스

2년여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위기로 한국 경제가 입은 내상도 이미 심각하다. 경기가 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 상승세를 탄 금리, 올해 1000조원을 돌파하는 국가채무, 터지기 직전인 가계부채 등. 문재인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난제만 한가득이다. 새 정부에서 2차 추경을 서둘러 편성해 풀더라도 재정 부담만 늘리고 제 효과를 못 낼 가능성이 작지 않다.

김갑순 동국대 경영대 교수는 “돌려쓸 만한 여유 예산이 거의 없다. 결국 지출을 추가로 늘리려면 국가채무 등 다른 방식의 국민 부담이 증가하게 될 것”이라며 “무리한 재정 확대는 오히려 경제 성장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마땅한 카드는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사태 때와 달리 솟구치는 물가 때문에 기준금리 인하도, 대규모 유동성 추가 공급도 유효한 수단이 되기 어렵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정부가 전기료 등 공공요금을 눌러왔지만 대선이 끝나면 바로 오를 수밖에 없어 공공요금 부담까지 커질 것”이라며 “시중에 돈이 풀려서 물가랑 환율이 다 올라가는 건데 자산시장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통화량을 조절할 것인지, 금리를 올리면서도 서민 주거를 안정시킬 것인지가 문재인 정부가 차기 정부에 남긴 숙제”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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