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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 넘어 '문망'…인문학 박사 37%, 연봉 2000만원도 못 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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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인문학 위기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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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희망고문’ 당하는 것과 같아요. 10년 넘게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도 100명 중 서너명만 교수가 되고, 기관으로 가는 사람까지 합하면 10명쯤 되죠. 나머지 90명은 어디서 뭘하고 사는지도 몰라요.”

고려대 한국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김재원씨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대학에서 철학 박사과정 중인 김모씨도 “대학원을 입학했을 때 선배들에게 느꼈던 감정은 ‘무기력함’이었다”며 “‘이 공부를 해봤자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자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말했다.

인문학이 사라지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 '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익숙해졌지만, 학계에서는 "그것도 좋았을 때 말이고 이제는 정말 '고사 직전'"이라고 한다. 인문학이 망하는(문망) 시대가 온다는 걱정이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이공계 첨단 기술 분야가 각광받는 사이 인문·사회학은 학문 존립마저 흔들리고 있다.

9년간 인문계열 학과 155개 없어져

계열별 학과 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계열별 학과 수.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교육부에 따르면 최근 9년간 전국 4년제 대학 인문계열 학과 155개가 사라졌다. 2012년에 962개였던 인문계 학과는 2021년 807개로 16%가량 줄었다. 학생 수가 줄면서 학과도 줄었지만 사회계열이나 자연계열은 8% 정도만 줄었다. 공학계열은 2012년 1333개에서 2021년 1446개로 113개(8.5%) 늘었을 정도다. 서울 사립대 관계자는 “인문계열은 취업률도 낮고 선호도도 떨어지다 보니 재정 압박을 받는 중소 대학일수록 구조조정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학자들은 우려를 쏟아낸다. 한 지방대 철학 전공 교수는 “최근 많은 대학에서 문사철(문학·사학·철학)을 없애고 교양대학을 만들어 교수들을 몰아넣었다”며 “더 이상 후속세대 연구자를 키우기 어렵고, 학문을 교양 이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기도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연구본부장도 “단기적으로는 통·폐합이 별 문제 없어 보이겠지만 결국은 학과가 사라짐으로써 후속 연구자가 고갈되고, 국가 발전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연구가 사장될 수 있다”며 “취업이 중요하니 작은 대학이 인문사회학과를 없애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너무 많은 대학으로 확산되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인문학 박사 취득자 37% '연봉 2000만원 이하'

박사 취업자 재직 직장.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박사 취업자 재직 직장.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은 말 그대로 ‘생존경쟁’에 내몰렸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2021년 신규 박사학위 취득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인문학 박사의 56.9%가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민간기업은 6.5%에 불과하다. 공학은 대학이 30.2%, 민간기업이 32.6%이고 다른 계열도 비교적 분포가 고른데 반해 유독 인문학도는 대학 의존도가 높다.

하지만 대학이 지속적으로 인문학과를 줄이고 신규 채용을 하지 않으면서 인문학도는 기약 없는 ‘무한경쟁’ 속에 있다. 수도권의 한 사학과 전공 교수는 “예전에는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등 시대별로 전공 교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고대사·중세사를 합쳐 한명만 남긴다”며 “고대사 전공과 중세사 전공이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자리의 질도 좋지 않다. 실태조사 결과 인문학 박사 취득자 중 37.3%가 연봉 2000만원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학 박사 취득자 중 연봉 2000만원 미만은 5.1%에 불과하다. 반면 연봉 5000만원 이상인 인문학 박사 취득자는 18.4%로 공학 박사 취득자(58.6%)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박사학위자 연봉 수준.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박사학위자 연봉 수준.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인문학은 사회간접자본, 당장은 티 안나지만 없으면 문제" 

연세대 영문학 석사과정 중인 한 학생은 “집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만 국내에서 인문학 공부가 가능하다”고 했다. 지원금이 풍부한 이공계와 달리 인문학은 외부에서 지원받을 길이 막막해서다. 한 박사 후 연구원은 “박사가 된 다음이 가장 활발하게 연구를 할 때인데 우리나라는 그 단계에서 완전히 맨 땅에 버려진다”고 했다. 학원 강사를 하며 연구를 이어가거나 결국 생활 문제로 학문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학계에선 ‘악순환의 고리’를 우려한다. 학과가 줄면 후속 세대 양성이 어렵고, 그렇게 되면 좋은 인재가 들어오지 않아 학과 입지가 더 줄기 때문이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특정 명문대를 나오지 않으면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가 될 수 있다”며 “인문학의 생명력은 다양성인데, 비슷비슷한 학교에서만 전문가가 나오면 절대 발전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강재 연구본부장은 “인문학은 사회간접자본(SOC)과 같아 당장 성과나 필요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으면 문제가 생긴다”며 “미래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려면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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